만들어지고 남겨지고 사라지듯 사라지지 않다.

'끝'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다가올 미래입니다. 작가와 작품도 언젠가는 끝이라는 단어를 만나며 죽음을 맞이하고 혹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며 사라지게 되는데요. 작품은 시대적 이상이 변하는 특수한 상황이나 화재 등의 재난이 아니라면 그 가치에 따라 극진한 관리를 통한 보존의 노력과 함께 작가보다는 오랜 시간을 견뎌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작품에 대한 극진한 대접과 보존은 작품을 만드는 많은 미술가들의 바람이자 꿈이기도 하죠. 작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작품이 계속해서 보존된다는 사실은 자신의 미술을 대변하는 작품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작품으로나마 미술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가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몇몇 미학 서적에서는 '아우라(Aura)'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요. 한국어로는 ‘기’ 혹은 ‘분위기'라는 말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단어입니다. 발터 벤자민이라는 독일 철학자가 처음으로 정립한 미학적 개념으로 시간과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미술만의 독특한 느낌을 설명하는 단어인데요. 오래전부터 제례적, 의식적 용도로 존재했던 미술이 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그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만들며 미술만이 가지는 숭고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죠. 이는 조금 이성적이지 못한 느낌의 단어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죽음 이후에도 남아있는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을 말하기에 딱 좋은 단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와 같은 관객의 감정과 함께 생기는 사회적인 현상을 이해해보기에도 상당히 좋은 단어이죠.

작가가 작품을 만들면 작품은 작가의 아우라를 간직하게 되는데요. 아우라를 간직하다는 것이 마치 비이성적인 마법과 같은 것을 말하는 듯하지만 이는 그저 작가와 작품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과 같은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어머니가 오래 사용하신 스카프를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간직하고 있는 한 자식의 모습처럼 특정한 물건을 특정한 사용자가 오래 사용했을 때 사람들이 그 물건을 보고 그 사용자를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죠. 그저 한 작품을 특정한 작가가 만들었다는 사실에 의해 작가와 작품이 서로 받게 될 영향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작품에 작가의 아우라가 남겨지는 과정은 평범할 수도 있었던 그림, 조형물 등의 물건을 특별한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미술이 가진 독특한 능력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이 아우라라는 것을 조금 더 일반적인 시각에서 이해해보자면 '묘비'를 떠올려 볼 수 있는데요. 한 사람의 묘비는 이후 그 사람의 부재를 슬퍼할 가족, 지인들에게 죽은 이를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가 됩니다. 이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그저 흔한 돌에 불과했던 돌덩어리에 죽은 이를 기리는 글귀를 새기는 것으로 '묘비'가 되며 한 죽은 이의 아우라를 가진 물건이 되는 것인데요. 한 작가의 아우라를 간직한 작품이란 이러한 역할을 사회 전체에게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묘비는 그 한 사람과 함께 했던 직접적인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라면 작가의 죽음 이후 남아있는 작품이란 그 작가가 만들어낸 미술적 행보에 대한 간접적인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차이가 있죠. 거기다 묘비는 살아생전 함께했던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작품은 작가의 죽음 이후 미술에 관심을 가지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작품들이 미술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미술이라는 것을 하며 작품을 만드는 거의 모든 작가들의 꿈과 같은 상황이죠. 심지어 그 영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랜 과거의 것이라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환상과 판타지가 덧붙으며 더더욱 탄탄한 가치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치를 인정받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져만 가는 영향력을 가진 작품들은 극진한 관리와 함께 보존되며 거의 무한한 시간을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요. 가끔은 정말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작품을 보관해놓는 수장고에 화재가 발생하여 연소되는 경우도 있고 사회가 혼란을 겪으며 많은 미술품들이 파괴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죠. 사회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되던 작품들이 사고로 혹은 사회에게 버림받으며 끝이라는 단어를 순식간에 만나는 시점이란 작가가 먼저 만났던 끝과 그리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작품 '나와 함께 잤던 사람들 1963 ~ 1995(Everyone I have ever sleep with 1963 ~ 1995)'


그런데 현대 사회의 끝이라는 단어는 꼭 ‘사라짐’을 의미하지만은 않는 듯합니다. 1999년 약 6천만 원(4만 파운드)에 매입되었던 트레이시 에민의 '나와 함께 잤던 사람들'이라는 작품은 2004년 수장고에 화재가 일어나며 불에 타버렸는데요. 작품을 소유하고 있던 미술 컬렉터 찰스 사치가 해당 작품의 작가 트레이시 에민에게 다시 제작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나 거절의 의사를 밝히며 결국 작품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 작품을 작품이 존재하던 당시의 사진을 보며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는 마치 묘비를 보며 사람을 생각하듯 또 작품을 보고 작가를 생각하듯 현대인은 사진을 보며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끝없는 복제의 사회에 있는 듯 모습을 보여주죠.


이는 아우라의 또 다른 복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작가는 작품에 아우라를 불어넣고 사진기는 작품을 사진으로 복제하는 것으로 작품에 담긴 아우라를 한층 더 간접적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복제하는 것이죠. 진품을 눈앞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작품의 사진을 보는 것으로 '작품을 본 적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현대인의 행동은 사진기의 이미지 복제 기술이 가진 능력을 보여주는 예인데요. 이와 같은 능력은 작품을 감상한다는 행위에 대한 정의에 큰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작품을 감상할 관객을 늘리는데 아주 큰 기여를 한 발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이 없던 시절 오직 진품을 보는 것으로 작품의 아우라를 느껴볼 수 있었던 관객들은 이제 사진을 통해 작품의 아우라를 간접적으로 나마 손쉽게 느껴볼 수 있게 된 것이니 말이죠.

앞서 언급되었던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사진과 영상이 가진 작품의 복제된 아우라에는 진품을 눈앞에 대면하며 느낀 진품의 아우라에는 모자란 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품이 존재하는 곳에 함께 있었던 그 시간과 공간(Here and now)이 발터 벤야민이 말하던 진품과 복제된 사진 등을 바라보는 것의 가장 큰 차이였는데요. 이는 듣고 보자면 하찮게 느껴지면서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부분일 수 있지만 한 공간과 시간에 함께 존재했다는 그 두 가지 사실은 어쩌면 현대인이 서로와 관계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우리가 묘비를 보며 죽은 지인를 기리는 것과 작품을 보며 과거의 작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의 차이는 죽음을 맞이만 지인과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추억에 있는 것일 수도 있죠. TV를 통해 늘 TV 속 인물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친근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우리의 친근함은 TV 속 인물들의 복제된 아우라와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인데요. TV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들의 아우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것은 이제 현대인에게는 아주 흔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결국 한 공간에 존재하며 시간을 함께 보낸 가족과 지인들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더 나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지만 이는 현대 사회에 나타난 새로운 관계의 모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죠.

이렇듯 우리는 서로의 아우라를 나누면서 관계를 맺으며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가끔은 눈앞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아우라를 느끼기도 하고 가끔은 작품 앞에 서서 작가가 불어넣어 놓은 작품의 아우라를 느껴보기도 합니다. 또 가끔은 작품의 아우라를 담아낸 사진을 보고 작품을 간접적으로 느껴보기도 하죠. 그렇게 사진으로 느껴본 복제된 아우라에 매료되어 진품을 찾아가 보고는 상상과는 다른 진품의 아우라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또 가끔은 평생 진품의 아우라를 느껴볼 수 없는 소멸된 작품의 사진을 보며 아쉬움을 간직하기도 하고 말이죠.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만들고 남겨지고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복제라는 기술과 함께 사라지듯 사라지지 않는 모호한 영역을 만들어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사라지고 싶어 하지 않는 의도일 수도 있고 소중한 것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의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희미하게나마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원한다면 끝이 없이 남아있을 수 있는 현대라는 사회에서 완전하게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이란 결국 그 누군가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는 가끔은 잔인하기도 또 가끔은 희망적이기도 한 양날의 의미를 가진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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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