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붕대로 감은 1889년 반 고흐의 자화상 더 좋은,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작가들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인내를 감수합니다. 더 좋은 것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미술에서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고통들을 인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에 작가들은 새로우면서도 더 좋은 것이라 생각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생각과 만듦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더 나은 것을 향하며 수반되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거의 모든 분야의 이들이 감수하는 고통과 다른 부분이 아닌데요. 그런데 이런 고통들 중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종류가 존재합니다. 바로 '헝그리 정신'이라 불리는 배고픔이라는 고통을 인내하는 정신을 뜻하는 말인데요. 기본 의식..
갤러리 혹은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며 가장 많이 드는 감정은 어쩌면 '이건 뭐지...?'와 같은 이해 못할 혹은 모르는 것에 대한 의문의 감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예술에 종사하고 있는 예술인들조차도 미리 조사를 하고 가지 않고서는 방문한 박물관 혹은 갤러리의 모든 작품들을 알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알 수 없는 작품 앞에서의 당황은 일반인과 예술인 모두에게 포함되는 상황이기도 한데요. 그런데 조금 더 황당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실은 가끔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는 작품을 만든 작품의 작가 본인조차도 본인의 작품에 대해서 알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도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알지 못한다니 어찌 보면 참 황당한 상황이지만 작가도 모르고 관객도 모른다는 사실은 관객으로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작품을 만들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무엇을 그릴지 또 어떻게 그릴지를 선택하는 것과 함께 작품을 시작하는데요. 이후 화가는 또 어디서 그림을 그리고 어디서 그림을 끝마칠지 선택해야 하는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심지어 위와 같은 요상한 양동이를 만들면서도 작가는 두 개의 양동이를 붙여버린 체 황동을 부어버리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요. 이런 요상한 양동이를 만들고 나서는 또 ‘노란색의 8(Yellow 8)’이라는 제목마저도 선택해야 하죠. 심지어 간단해 보이는 사진이라는 예술도 비슷합니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사진으로 찍을지를 결정해야만 하는데요.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그저 거리를 돌아다니며 우연한 기회를 찾아 헤맬 것인지 혹은..
일러스트레이터, 화가, 산업 디자이너 등 세상에는 생각보다 굉장히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설계를 위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고객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오직 그림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연중에 오직 그림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이 가장 순수하며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오직 그림을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은 화가의 그림을 아주 순수한 무엇인가로 보이게 만드는 배경이자 표현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결국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모두 그저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크게 묶어버린 이 영..
대학교의 졸업 전시회는 공식적으로 가장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장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졸업 전시회를 돌다 보면 영상 작품 등을 전시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아주 오래된 TV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작가들이 주를 이루는 졸업전시회에서 이제는 일상에게 보기 힘든 15살 이상은 먹어 보이는 오래된 볼록렌즈 TV라니 참 오묘한 조합이죠. 이런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에서 사용된 오래된 TV들을 보고 있자면 이 작가는 왜 화질도 낮은 오래된 TV를 영상 작품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는 합니다. 잘 만들어진 영상을 화질이 낮은 TV를 이용해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영상 작품을 전시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