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품과 복제품, 겉모습 뒤 혹은 속의 모습들.

문득 그런 생각을 한 번 했던 적이 있습니다. 만약 정밀 기술이 더 발전하여 화가의 그림을 그저 사진처럼 이미지로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마저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라는 생각이었는데요. 그저 눈으로 보기에 똑같은 복제가 아니라 그 과정마저 완벽하게 복제된 복제품과 원본에 대한 생각이었죠.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대가의 그림 그리는 과정을 녹화 한 후 붓의 움직임을 비롯한 붓에 묻어나는 물감의 양마저 세밀한 단위로 분석하여 정밀 기술로 만들어진 로봇팔을 이용해 녹화된 피카소의 그림 그리는 과정과 완벽히 일치하는 과정으로 그림을 복제한다는 것인데요. 이렇게 과정마저 완벽하게 복제된 그림과 피카소의 원본 그림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생각은 붓질 하나하나에 작가의 혼이 실린다는 표현에 의문을 가지며 시작한 생각이었는데요. 복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는 현재에 더 어울리는 예 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제 글에서 많이 등장하는 '아우라(Aura)’라는 개념이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두 그림의 차이를 느껴보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은데요. 이 개념을 처음 내놓은 발터 벤야민은 이 ‘아우라’라는 개념과 함께 복제품과 진품에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진품이 작가에게 만들어졌던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 느낌은 그 과정을 완벽하게 복제한 복제품이라 할지라도 절대 가질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붓 터치 하나하나의 과정마저 완벽하게 복제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피카소에게 그려졌다는 사실과 로봇팔에게 그려졌다는 사실이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피카소와 로봇팔에게 그려졌던 그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죠.

진품과 복제품 사이에는 이처럼 절대로 흩트릴 수 없는 견고한 벽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에서만큼은 진품과 복제품에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대가의 그림을 일반 용지에 프린트하여 거실에 걸어놓고 하는 감상과 미술관에서 진품을 바라보며 하는 감상, 이 두 감상의 방식 모두가 감상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인데요. 이와 같은 생각 속의 감상에 대한 모습은 현대라는 사회에서 더더욱 뚜렷해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감상이라는 것은 ‘작품을 눈으로 보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실 현대의 미술에서 본다는 것은 더 이상 큰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죠.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을 활용한 앤디 워홀의 작품들


어쩌면 일상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작품으로 미술관과 갤러리에 등장했던 그 시점부터 작품을 그저 시각적으로 본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림, 조각 등 미술가의 손으로 탄생한 작품을 기대하며 미술관을 방문한 관객들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의 박스, 토마토 스프캔 등을 마주치고는 당황스러운 감정에 빠져들게 되는데요. 이 당황은 '이 물건이 왜 여기 놓여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물건이 여기에 왜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의 존재는 어쩌면 작품의 겉모습을 넘어 작품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시작점이 되는데요. '겉모습을 넘어 속을 바라본다.'는 문장은 그저 겉모습만을 바라보는 행위보다는 한 차원 더 멋진 행위처럼 들립니다. 그렇지만 미술가가 만들지 않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기성품을 미술관에 작품으로 내놓는 미술가의 모습은 그리 멋진 행위처럼 보이지는 않죠. 오히려 작품을 대충 만들어놓고는 무엇인가 담겨있는 듯 사기를 치는 듯한 모습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과거 미술의 끝 지점에는 현실과 똑같은 물건을 내놓는 행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복제품이 진품을 따라가는 유일한 방법은 진품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니 말이죠.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을 그 과정마저 완벽하게 복제하여도 결국 피카소의 그림이 아닌 조금 더 정밀하게 복제된 복제품이 되는 것처럼 미술은 현실과 똑같은 물건을 내놓았음에도 현실이 되지는 못 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복제한 그림에 피카소가 그렸다는 사실이 부재하는 것처럼 현실과 똑같은 물건을 내놓은 작품은 현실의 물건이 놓여있던 그 시간과 공간의 배경마저 복제하지는 못한 것이죠.

그렇지만 이러한 시도가 현실을 반영하고 담아내려고만 했던 과거의 미술과는 다르게 현실을 반영하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현대의 새로운 미술을 시작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작가는 아무 생각 없이 작품을 내놓았다고 해도 관객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작품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 등을 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런 물건이 왜 여기 작품으로 놓여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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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