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럽다 혹은 다양하다.
- 에세이/현대미술
- 2017. 7. 22. 17:42
'혼란스럽다.'라는 단어는 어쩌면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가지는 가장 흔한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방문하는 전시회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현대미술의 작품들은 처음 이를 접하는 이들에게 혼란 그 자체의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데요. 사실 이런 혼란스러움은 현대의 관객들이 미술을 기피하는 큰 이유가 되기도 하면서 캔버스에 그려지는 그림과 정갈하게 조각된 조각상처럼 정확하게 틀이 잡힌 매체만이 존재하던 과거의 미술을 동경하게 만드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현대미술의 이런 혼란스러움은 과거와는 다르게 현대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특징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가끔은 정말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품이 만들어지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는 미술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혼란스러움이라는 새로운 특징을 가지게 된 이 현대사회의 모습을 동시대의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들기 시작하는 의문은 '그렇다면 현대는 왜 혼란스러움이라는 새로운 특징을 가지게 되었을까?'인데요. 개인적으로는 과거 전통적인 사회와는 다르게 대중의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려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채프만 브라더스의 작품과 함께 있었던 제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들어보시면 이 부분을 함께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채프만 브라더스(Chapman Brothers)의 작품
한 SNS에 채프만 브라더스의 작품을 소개하는 포스팅이 올라왔었는데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채프만 브라더스는 충격미술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작가 듀오로 작품의 이미지가 그야말로 충격적이면서 혐오스럽기까지 한 비쥬얼을 가지고 있죠. 이에 많은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덧글을 남기고 있었는데요. 그 사이에 눈에 띄는 덧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내 스타일♥'이라는 간단한 문장을 남긴 한 여성의 덧글이었는데요. 혐오와 충격의 대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보고는 '완전 내 스타일'이라는 말을 남기며 하트 이모티콘까지 붙이시는 이 분의 정체가 상당히 궁금해 그분의 개인 프로필에 들어가 보는 지경에 이르렀었죠. 실제 그분의 프로필에는 그분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는 다소 충격적인 비쥬얼의 포스팅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 혹은 많이 당황스러울 정도의 극단적인 경험이었지만 문득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이만큼이나 존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기도 했죠.
물론 이 현대사회의 대중 대부분은 혐오스러운 작품을 향한 사랑이 담긴 취향을 표현한 이러한 덧글을 정상이라 바라보지는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괴짜 혹은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시선이 일반적이죠. 하지만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오른 시기에 이와 같은 충격적인 비쥬얼을 좋아하는 여성이 이런 취향을 당당히 말했다면 실제로 마녀사냥을 당하며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독특한 사람 혹은 괴짜라고 생각하며 배척하기보다는 사회의 특이한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 자체가 현대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상당한 취향 존중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특정 소수 계층이 지배계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전체가 공식적인 사회의 주인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민주주의라는 사회의 새로운 사상이 이와 같은 현대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환경적 요인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중 전체가 사회의 주인으로 존재하니 한 명 한 명의 취향을 존중하는 과정의 결과로 다양한 취향이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처럼 현대사회의 취향은 다양해졌고 과거에 비해 거대해진 대중은 다양한 취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자라난 현대의 작가들 또한 다양한 취향과 함께 다양한 모습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현대사회의 미술이 전시되는 공간은 또 이와 같은 다양한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모습의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현대에 들어 새롭게 나타난 하얀색의 벽을 가진 전시공간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요. 특별한 장식이 없는 흰 벽에 둘러싸인 하얀색의 전시공간은 어쩌면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취향이 담긴 작품을 존중하기 위한 최적의 공간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얀색의 갤러리
시간을 조금 거슬러올라 미술이 전시됐던 공간은 교회, 성당, 수도원 같은 종교 건물 혹은 왕의 궁전, 귀족의 저택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소수 계층의 공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요. 이런 공간이 미술에게 끼치는 영향은 간단하게 교회에는 교회에 맞는 기독교의 미술, 왕의 궁전에는 왕의 초상화, 귀족의 저택에는 귀족의 초상화처럼 각 공간에 맞는 혹은 어울리는 작품이 전시되어야만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불교의 탱화와 같은 그림이 걸려있는 것은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흰 벽을 가진 현대의 하얀 전시 공간은 모든 작품이 전시될 수 있는 흥미로운 환경을 조성해버리는데요. 절대로 한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독교의 예수님을 조각한 조각상과 불교의 부처님을 재현한 불상을 종교미술이라는 하나의 타이틀로 묶어 같은 공간에 전시할 수 있게 만들어버리는, 생각해보자면 참으로 흥미로운 환경을 완성해버리는 것이죠.
스님, 신부님, 목사님과 같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치기도 하는 종교라는 큰 개념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을 수 있는 이 하얀색의 공간은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취향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개념의 작품들을 모아놓을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이렇게 다양함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만 했던 전시 공간이었을 수도 있죠. 교회, 절, 궁전처럼 공간이 가지고 있는 배경이 미술을 지배했던 시대와는 다르게 비어있는 배경을 통해 전시되는 작품을 존중하는 모습은 어쩌면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존중하려는 이 사회의 모습과도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과거 왕권이 바뀌거나 혹은 시대의 종교가 바뀌면서 핍박을 받으며 폐기되는 운명을 맞기도 했던 과거 시대와는 다르게 과거와 현재를 모두 존중하며 보존하려는 현대의 모습은 더더욱 미술에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는 것일 수도 있죠.
이렇게 현대의 다양한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작품들부터 과거에 만들어진 오직 소수 계층을 위했던 미술들까지 어쩌면 정말 현대에서 전시되는 미술은 하얀색으로 둘러싸인 자유로운 공간 안에서 뒤죽박죽 엉킨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며 갑작스럽게 나타난 다양함과 그런 다양함에 대한 존중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뒤죽박죽 엉켜있는 듯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하나하나를 이해해보며 엉켜있는 것을 풀어헤쳐 이해해보려는 시도보다는 혼란스러움 자체를 그저 다양함으로 바라보거나 혹은 '내가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원래 혼란스러운 녀석이구나'라고 받아들인다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현대의 미술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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