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판타지
- 에세이/미술과 사회
- 2016. 1. 4. 00:06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사람들은 미술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People have too many fantasies about what art is about.)
이 문장은 중국 작가 '아이 웨이웨이'가 인터뷰 도중 내뱉은 문장입니다. 평소 그의 유쾌한 행보와 작품들로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내뱉어놓은 이 문장은 제가 평소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던 부분을 시원하게 표현해주는 말이었습니다. 예술을 어렵고 대단한 것으로 바라보는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판타지는 어쩌면 미술을 이해하고 감상하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가장 높은 진입장벽일지도 모릅니다.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되는 것을 익히 들으며 형성된 미술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판타지는 이해할 수 없는 미술 작품 앞에서 찾아오는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눈앞에 마주하며 경험하기 전까지는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눈앞에 마주하며 경험하고도 모른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렘이 존재하지 않는 두려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 찾아오지만, 여행을 떠나 그 현지에서 찾아오는 여행지에 대한 무지와 낯섦은 가끔 공포와 가까운 두려운 감정을 들게 만듭니다. 물론 여행지에는 인포메이션 센터나 주위 사람들에게 정보를 물어보면 되는데요. 더구나 요즘은 해외에서도 검색이 가능한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무기까지 존재하죠. 하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에 덩그러니 놓인 관객들에게 미술에 대한 판타지적인 궁금증을 실제적인 정보와 해법으로 가르쳐줄 이는 많지 않습니다. 거기다 스마트폰으로 찾는 작품에 대한 정보들은 일반 관객으로서 알아듣기 힘든 설명들이 난무할 때가 많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미술은 짓궂게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보다 훨씬 거대한 판타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판타지의 형성 이유가 어찌 됐든, 이 판타지는 확실히 관객들이 미술을 즐기고 감상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죠.
미술은 생각, 판단, 표현 그리고 소통이다.
(Art is about ideas, about decisions, about expression and about communication)
사람들이 미술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아이 웨이웨이는 인터뷰에서 미술을 '미술은 생각, 판단, 표현 그리고 소통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굉장히 공감을 하고 있는데요. 조금 더 깊게 파들어간다면 아주 세세하게 다른 많은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미술은 사실 미술가의 생각을 통해서 판단된 표현의 수단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관객과 소통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미술이 이런 거대한 판타지를 가지게 된 이유는 어쩌면 미술가 개개인이 모두 다르게 가지고 있는 생각과 판단, 표현 그리고 소통의 수단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고전미술과 현대미술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변화도 그 거대한 판타지의 한몫을 하고 있죠.
리차드 잭슨(Richard Jackson)의 나쁜 강아지(Bad Dog)
이런 거대한 판타지가 아주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리차드 잭슨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차드 잭슨은 회화(페인팅)에 대해서 말하는 작가로 이 '나쁜 강아지'를 통해서 강아지가 볼 일을 보는 행동과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동을 같은 것으로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우리들의 판타지를 완벽하게 부숴버리는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차드 잭슨은 화가와 동일한 예술가로서 강아지의 소변과 화가의 물감을 동급으로 취급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행동에 대한 생각을 이 '나쁜 강아지'라는 작품과 함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물론 이런 표현 방식은 굉장히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술에 대한 판타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좋은 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미술에 대한 판타지는 관객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술가들에게도 이 미술에 대한 판타지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 존재하는데요. 미술가조차도 미술가 본인의 작품을 만드는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각자의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 미술입니다. 미술가들은 이렇게 판타지 속에서 답을 찾아 헤메고 자신만의 답을 찾지만, 그 답은 판타지 속의 현실이 아닌 판타지 속의 판타지로서 존재하게 되어버리죠. 마치 여행지에 살고 있는 현지인조차도 그 여행지를 모르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모습이 미술관에서 미술의 판타지를 접한 관객이 혼란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객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미술 판타지 속의 현실을 찾아 헤매지만, 미술에는 판타지 속의 판타지들만 존재하니 말이죠.
앞에서도 말했듯 모른다는 것은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게 만듭니다. 하지만 보고도 모른다는 것은 답답함과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죠. 사실 모든 미술가들이 느끼고 있는 미술에 대한 감정이 바로 이 답답함과 두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술 작품을 만드는 우리조차도 미술이 무엇인지 모르니 말이죠. 하지만, 미술가와 관객 모두가 어차피 이 미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이 답답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이 판타지에 대해서 더욱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요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모르는 여행지를 함께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모두를 설레게 만드는 모험 일지도 모르죠. 미술이 풀 수 없는 판타지라는 현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나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미술 작품이라는 미술 판타지 속의 판타지 앞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생각을 펼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에세이 > 미술과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숙하지 않은 새로움을 알다. Part 1 [ 1 / 2 ] (0) | 2017.04.19 |
---|---|
돈이 들어오는 그림 (4) | 2016.06.13 |
조영남씨의 그림과 모두의 불편함 (2) | 2016.05.23 |
문화적 서열 (2) | 2016.05.20 |
언어로서의 미술 (0) | 201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