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만족시키는 순수미적 가치는 없다.

낙찰가 5840만 달러를 기록한 '제프 쿤스(Jeff Koons)'의 오렌지색 '풍선개(Bolloon Dog)'


제가 기억하기로는 2014년 여름 즈음 제프 쿤스의 풍선개라는 작품이 약 719억(미화 5840만 달러 : 현재 환율 1232원)이라는 가격에 팔렸다는 사실이 공개되며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가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요 한국에도 이런 사실을 담은 기사들이 나오며 미술이 간간이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는 했었죠. 그런 시기에 제 친형이 이 기사를 보여주며 ‘이게 말이 되는 거냐?’라는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응’이라는 짧은 답변을 하며 ‘원래 미술에는 원초적으로 순수미적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혹여나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미술인에게 내뱉었다면 작은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제 가치관이 듬뿍 담겨있는 말이었지만 편하디 편한 가족 중에서도 더더욱 대화하기 편한 형이었기에 제 가치관에 편향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는 이후 제가 내놓은 대답을 통해 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재미난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제 대답에서 사용됐던 ‘순수미적 가치’라는 단어는 생각해보자면 참 재미난 단어입니다. 어쩌면 미술가들이 늘 고민하는 미술의 가치를 표현하는 단어 중 가장 높은 가치를 뜻하는 느낌의 단어가 바로 이 ‘순수미적 가치’일지도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의 미술에서 절대적인 ‘순수미적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술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고 순수한 미술이 없다는 뜻도 아닌 오직 하나이자 최고로서 누구에게나 최고로 평가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미술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죠.


현대 이전의 고전미술들은 늘 가치를 결정해주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했습니다. 종교 시대에는 종교 미술이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고 왕 혹은 독재자의 시대에는 왕을 드높이고 독재자를 찬양하는 미술이 최고의 미술로서 자리 잡았죠. 그리고 귀족 중심의 사회에서는 귀족들의 취향에 맞춰 최고의 미술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렇게 과거 미술의 가치를 결정지어주던 기준들은 당시 시대를 통치하고 있는 통치 계급의 취향과 기호에 따라서 결정이 되었는데요. 현대라는 이 시대는 독특하게도 공식적으로는 통치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혹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시대의 주인으로서 존재하는 민주적인 사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극소수에 의해서 통치되던 사회의 모습과는 다르게 현대의 통치자는 광범위하게 넓어진 대중 모두인 것이죠. 이렇게 통치 계급의 범위가 넓어진 만큼 그 취향의 범위도 광범위하게 넓어졌는데요. 취향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이 표현은 취향이 다양해졌다는 말과도 같은 뜻을 가지며 모두에게 최고의 가치를 가진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현대의 모습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대중 각자의 취향이 모두 다르면서 본인만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각자의 최고 작품이 존재하는 현대의 독특한 모습이죠.


제프 쿤스(Jeff Koons)


하지만 현대라는 지금 이 시대는 또 독특하게 자본이 힘으로서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돈과 자본의 가치를 뜻하는 ‘가격’이라는 숫자는 대중들이 판단하는 개인적인 가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죠. 사실 가격이라는 것은 자본적인 가치로서 민주적인 가치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자본이 힘과 권력으로 존재하는 듯한 현대 사회의 모습은 가격이라는 사회적인 가치가 개인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본인의 취향(민주적 가치의 기준)과는 다른 높은 가격(자본적 가치의 기준)은 혼란을 초래하면서 대중들에게 ‘미술은 사기다.’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만들죠. 분명히 본인의 취향으로서는 가치 없어 보이는 작품이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가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충분히 ‘미술은 사기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위와 같은 현대의 특이한 환경에 대한 부분을 펼쳐놓으면서 조금 더 쉽게 풀어보기 위해 부모와 자식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자식이 부모를 위해 처음으로 그려낸 그림은 그 어떤 거장의 그림보다 부모님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부모님을 위해 그려온 그림은 거장의 그림들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감동과 함께 특별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사실 이런 생각 혹은 깨달음을 얻었던 계기는 그림을 그린 저 초자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제 어린 시절의 그림들이 부모님의 옷장 속에 스크랩되어 보관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이후였는데요. 현대미술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들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은 저희 부모님이시기에 더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부분이었습니다. 작품을 위해 해외로까지 나와 공부하며 만들어놓은 현재의 작품보다 작품으로도 생각하지 않던 어린 시절의 그림이 오히려 더 특별한 작품으로서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개인의 취향과 가치라는 것은 사회가 정해놓은 가치에 맞는 작품들로 가득 찬 미술관의 미술들과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절묘하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저희 부모님에게는 어쩌면 미술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 현재의 제 작품보다 저와의 과거 추억이 담긴 제 어린 시절의 그림들이 더욱 소장한 물건으로서 받아들여지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죠.


이렇게 어린아이는 그 어떤 거장도 전할 수 없는 감동을 부모님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특별한 미술가일지도 모릅니다. 부모님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시간들은 그 어떤 거장의 그림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죠. 이런 가치를 대게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린아이의 그림은 부모님들의 개인적인 가치가 담겨 있는 것이니 사회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돈’과 ‘가격’은 당연히 그 가치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죠. 그리고 이 부분을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거장의 그림들이 수 백억의 단위의 가격과 함께 그 사회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는데요. 우리의 어린 시절의 그림들이 부모님과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장들의 그림은 인류 미술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한 나라의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의 시대가 시작돼듯 각 시대의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들은 시대에 맞춰 사라지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린 그림은 왕들이 사용했던 칼과 장신구처럼 시대를 기억하기 위한 귀중한 물건으로서 보관되고 보존되죠.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을 대표하는 이 물건들은 그 희소성과 함께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고종 황제가 직접 사용했던 의복과 물건들이 높은 가격을 책정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처럼 말이죠. 이처럼 교육을 받는 이 세상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알고 있을 피카소의 그림이 수 백억의 가격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아이의 그림이 개개인의 추억이 담긴 개인적인 가치와 희소성을 가진 미술이라면 피카소와 같은 거장의 그림은 인간 역사의 추억이 담긴 사회적인 가치와 희소성이 담긴 물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잘못하면 한 장의 휴지보다도 가치가 없어질 수 있는 종이와 물감이라는 존재를 한 인간을 추억하게 할 수 있는 소중한 물건으로 만들고 가끔은 인류 전체를 추억하게 만드는 값진 물건으로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예술과 미술의 대단한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현대사회에 들어오며 모든 개인과 모든 사회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순수미적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못하는 환경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각 개인과 사회를 만족시키는 그들만의 가치를 가진 미술들이 존재하기에 지금도 미술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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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