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그림과 현대미술의 그림
- 에세이/미술과 가치
- 2016. 7. 12. 12:18
최근 지인이 인터넷에서 공유되고 있는 세 살 아이의 그림과 현대미술 작가의 그림을 비교하는 글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세 살 아이의 그림과 현대미술 화가들의 그림들을 랜덤으로 배치해놓고는 무엇이 고가의 가격을 가지고 있는 현대미술 작품인지를 맞추는 퀴즈 형식의 글이었는데요. 이 글이 현대미술의 그림과 세 살 아이의 그림이 왜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에 대한 미학적인 질문보다는 현대미술의 그림을 조롱하고 희화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명확했지만,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저 조차도 세 살 아이의 그림과 현대미술 작가의 그림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습니다. 비슷한 겉모습과 함께 왜 비슷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한 이 부분은 또 겉모습 만으로는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는 특징과 함께 조롱과 희화화도 충분히 가능한 부분이었는데요. 세 살 아이의 그림과 억대의 가격을 받는 미술 작가의 그림이 서로가 시각적으로 확연히 구별될 수 없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지는, ‘미술은 사기다.’라는 대중들의 일반적인 시각에 가장 공감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가 그려놓은 것 마냥 뿌려놓은 물감들이 억대의 가격을 받는다니, 교양 혹은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을 떠나 이것은 사기가 맞다는 생각이 확연하게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처럼 시각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세 살 아이의 그림과 현대미술 작가의 그림을 구별해주는 요소는 아주 간단하게 ‘현대미술 작가가 그렸다.’라는 작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현대미술 작가가 그렸다는 작은 사실 하나가 세 살 아이의 그림과 현대미술 작가의 그림을 구별하는 하나의 요소라 말하는 이 말도 어쩌면 ‘미술은 사기다.’라는 대중의 시각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문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마치 과거 조선시대의 일반 여성들이 사용했던 옥비녀 보다 명성황후가 직접 사용했던 옥비녀가 더욱 가치 있어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신기하게도 물건의 가치는 가끔 물건의 외적인 가치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이용 되고 혹은 만들어졌다는 사실 하나로 그 가치가 천문학적인 단위로 배가 되기도 합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용하셨던 옥비녀가 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과도 비슷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 '추상(Abstraktes Bild)'
한 명의 미술 작가와 함께 이 부분을 조금 더 미술적인 부분으로 살펴보면 재미있겠습니다. 위 그림은 ‘게르하르트 리히터’라는 독일 작가의 그림인데요.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2015년에 기록된 생존 작가의 작품으로서의 작품가 사상 최고 기록인 512억 원 (4천4백만 달러)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거기다 이 512억 원이라는 2015년의 기록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2012년의 391억 원 (3200백만 달러)이라는 최고가 기록과 2014년의 420억 원 (3710백만 달러)의 기록을 본인이 갱신한 사례이기도 한데요. 이 그림도 역시 지금 당장 물감을 쥐어준다면 그릴 수 있을 법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가 같은 방식으로 아주 완벽하게 똑같은 그림을 그려냈다고 해도 ‘게르하르트 리히터’라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다른 이의 그림과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에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죠.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1932년에 태어나 한 평생을 미술과 함께하며 살아온 84세의 나이를 가진 고령의 작가인데요. 그의 적지 않은 나이는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 등의 작가들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그들의 작업을 보고 자랐고 혹은 같은 시기의 활동하기도 했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를 미술 역사의 산증인으로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거기다 리히터가 이런 수많은 거장과 함께 살아온 1900년대는 ‘현대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영역이 본격적으로 구축되며 미술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인데요. 리히터는 독특하게도 이런 1900년대 미술의 다양한 변화와 함께 맞물려 변화하는 듯한 시기별 다른 스타일의 그림들을 그리고 만들어오는 작업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변화와 함께 변화해온 듯한 그의 작품들은 그를 더더욱 미술 역사의 산증인처럼 보여주고 있죠.
이런 배경을 가진 그의 작품은 생존 당시의 가격보다 사후의 가격이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생존 작가로서의 최고가를 갱신하며 그의 작품을 구매한 이들은 그저 그의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구매한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작가가 사망하는 순간 더 이상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작가가 생존 당시 만들어놓은 작품들의 희소성을 급격하게 상승시키는데요. 세상에 하나 밖에 없고 더 이상 비슷한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이 미술 작품이 가지는 희소성은 작가 사후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는, 많은 돈과 함께 투자를 원하는 이들에게 꽤나 괜찮은 안정성과 이율을 가진 투자 상품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죠. 큰 이변이 없는 한 이미 유명한 작가의 사망 이후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유명 작가의 작품은 어쩌면 언제 망할지 모르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손실 위험이 적고 이율도 높으면서 겉으로는 교양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그 이점이 아주 다양한 물건인데요. 사실 그림이 그저 너무 마음에 들어 수 백억의 가격과 함께 그림을 구매하는 사람이 많을지 혹은 수 백억의 이율을 바라보며 수 백억의 가격과 함께 그림을 구매하는 사람이 많을지에 대한 의문은 어쩌면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작품의 겉모습은 어쩌면 작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림이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보이든, 현대미술 작가의 그림처럼 보이든 그림을 구매하려는 이들에게는 그림을 그려낸 주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죠. 물론 모든 화가들이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같은 역사의 산증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이미 고가의 가격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가격 상승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작품의 겉모습과 상관없이 그저 작품의 가격 상승을 바라보며 구매하고 또 그에 맞춰 가격이 올라가고 하는 이 모습은 어쩌면 일반 관객들에게 더더욱 ‘미술은 사기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만드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린아이의 그림과 고가의 그림은 그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내 아이의 그림이 가지는 특별함은 현대미술 작가의 그림이 가지는 특별함과 가격 이외에는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내가 좋아하는 한 무명작가의 그림과 내가 관심이 없는 거대한 가격을 가진 작가의 그림도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겠죠. 가격이란 사회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교환을 위한 돈이라는 수단의 기준일뿐, 나의 취향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서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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