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그리다. 그림을 찍다.
- 에세이/현대미술
- 2016. 4. 23. 11:30
글쓴이의 작품 '포토페인팅(Photopainting)'
그림과 사진, 이 둘은 알면 알수록 참 오묘한 관계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을 들고 벽에 그림을 그렸던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마저도 지금 우리가 말하는 그림으로 인정한다면 그림은 인류가 탄생한 그 시기부터 함께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오랜 역사를 가진 예술인데요. 그에 반해 약 200년이 채 되지 않는 역사를 가진 사진이라는 예술 속의 새로운 매체는 수만 년의 역사를 가진 그림이라는 예술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사진이 가져왔던 그림의 거대한 변화는 사실 그저 변화를 넘어 그림의 역할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던 생존의 위협에 가까운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는데요.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사진이라는 이 새로운 예술이 수만 년의 시간 동안 그림이 가지고 있던 현실 묘사라는 역할을 이미 빼앗아 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할을 빼앗긴 그림은 또 사진이 할 수 없는 그림만의 새로운 역할을 찾아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죠.
사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세상을 눈으로 보는 이미지로서 재현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림의 역할이었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겠다는 것은 지금 듣기에는 참 터무니없고 비효율적으로만 느껴지는 사실인데요.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는 그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일이었죠. 그런데 또 당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현실을 재현하는 행위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던 것에 반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기술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행위였지만 흔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던 것이죠.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발명된 카메라라는 기계는 손에 드는 순간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가지게 해주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해내는 물건이었는데요. 실제로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카메라가 대중에게 소개되던 당시 사진을 찍는 행위를 기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집니다. 눈으로 보는 이미지라고는 화가 그려놓은 그림뿐이었던 당시의 환경으로서는 사진기라는 존재가 기적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존재였죠. 여기서 한 가지 더 그림과 사진을 연결할 수 있는 재미난 사실은 카메라의 초기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화가였다는 점인데요. 프랑스의 화가 ‘다게르’가 더 빠르고 정확한 스케치를 위해 발명한 ‘다게레오타입’이라는 기계가 바로 사진 역사의 시초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값비싼 화학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 과정으로 인해 저렴한 화학 재료로 대체된 후기 사진 기술에 밀려 더는 사용되지 않는 기술이지만, 그림을 그리던 화가가 더 빠르고 정확한 스케치를 위해 사진 기술의 토대를 발명해버렸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죠. 더 빠르고 정확한 스케치를 위해 기계를 발명해놓았더니 사람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기계가 만들어져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사진은 이렇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서 발명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물론 지금 이 현시대의 사진과 그림은 확연하게 다른 객체로서 받아들여질 정도로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그 둘의 시작점에 이미지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화가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사진과 그림이라는 두 매체의 오묘한 관계를 느끼게 해주는 역사적인 사실 같습니다.
이런 사실들과 함께 저는 개인적으로 그림과 사진을 ‘이미지’ 혹은 ‘눈으로 보는 이미지’와 같은 말과 함께 이 둘을 같은 객체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림이라는 이미지를 다뤄내던 화가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리기 위해 탄생한 것이 사진이었던 것처럼, 그림과 사진은 결국 이미지를 다루는 조금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을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었던 사실은 사진과 그림은 신기하게도 서로의 장단점을 교묘하게 바꿔서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재현’은 그림과 사진이라는 비슷하면서도 달라 보이는 두 예술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장 큰 요소인데요. 앞서 ‘사진이 그림의 역할을 빼앗았다.’라는 표현을 했었던 이유의 중심에도 바로 이 재현이라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사진과 그림은 둘 다 세상을 재현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굉장히 다른 과정과 방식을 통해 재현해내고 있죠.
일단 그림은 완성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배우는 것에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죠. 그에 반해 사진은 그림보다 굉장히 간단하고 빠른 제작 과정을 가지고 있는데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그림의 제작 과정은 그림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림의 단점은 어쩌면 과거 화질이 높지 않고 사진 인화에 시간이 걸렸던 초기의 사진 기술에 조차 세상을 재현하는 역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는데요. 눈앞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포착해서 사진으로 만드는 사진기와는 달리 화가는 눈앞에 벌어지는 순간을 보았다고 해도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 기억에 의존하며 자신의 해석과 함께 그림을 완성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은 이렇게 ‘재현’이라는 역할에서만큼은 그 정확도와 제작 시간 모두에서 사진에게 패배의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요. 하지만 ‘재현’이라는 요소에서 그림에게 완승을 거두게 만들어준 ‘빠름'이라는 사진의 장점은 ‘창작’이라는 면에서 그림보다는 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림 안의 배경과 인물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바꿀 수도 있는 그림과는 달리 사진은 눈앞에 실제로 펼쳐지고 있는 상황만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는 극적인 단점을 가져버린 것이죠.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빠르게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는 이 장점은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지 순간을 만들어내는 창작의 영역에서 그림보다 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단점이었는데요. 물론 촬영 스튜디오로 배경을 만들고 모델과 협력하며 사진 속 인물들을 사진가의 의도와 함께 배치하는 것으로 이 단점이 조금은 보완되기도 했지만, 물감 몇 번 덧칠하는 것으로 이미지를 바꿔낼 수 있는 그림에 비교하자면 아쉬운 느낌이 많았죠.
이렇게 사진기와 함께 그저 눈앞에 있는 순간을 찍어낼 수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접한 화가들은 이를 예술로써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사진이 탄생하던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서는 앙리 마티스를 비롯한 당시의 거장들이 대놓고 사진을 예술의 영역으로 보지 않고 무시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에 반해 대중은 이미 너무나도 현실적인 사진의 재현력이 만들어내는 자극에 매료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보지 못한 곳 혹은 가보지 못할 것 같은 곳에서 찍어온 다른 문화권의 사진들과 자연 절경은 그림이 한 번도 선사해주지 못했던 새로운 자극이었죠. 그리고 이런 새로운 자극은 대중들에게 사진을 새로운 예술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주는 강력한 요소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과거 화가들도 여행을 떠나 다른 문화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왔었고 그림을 보는 대중들이 보지 못하는 자연 절경 또한 그려왔었는데요. 하지만 그림이 가지고 있는 재현에 대한 한계는 일정 부분을 관객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사진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 그거 본 적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재현력을 가지고 있었죠. 이에 그림은 상당히 재미있는 변화를 통해 사진과는 다른 그림만의 색다른 자극을 만들어 내는데요. 세상을 똑같이 재현해내는 사진과는 반대로 현실과 다른 색, 형태 혹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죠. 현실적으로 사람의 살색이라고 볼 수 없는 청록색을 사람을 그리기 위해 사용하는 야수파 혹은 인상파 화풍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사물의 형태를 부숴놓은 듯한 입체파 화풍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실과는 완전히 달라 보이는 비현실적인 세상을 그리는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도 탄생했죠. 화가들이 만들어낸 이와 같은 새로운 그림의 영역은 세상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을 무기로 삼고 있는 사진으로서는 쉽게 침범할 수 없는 그림만의 확실한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나타난 추상화라는 더욱더 새로운 그림의 영역은 사진이 가진 완벽한 재현과는 정반대되는 성격의 그림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풍인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당시 현실에 대한 재현을 조금씩 조금씩 포기한 끝에 추상화를 만들어낸 화가들의 선택은 재현에서 역할을 빼앗겨버린 그림으로서는 탁월하고 영리한 선택이자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해석합니다. 만약 화가들이 사진의 탁월한 재현력을 보고도 재현이라는 역할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며 현실 재현을 위해 노력했다면, 결국 ‘사진 같은 그림’이라는 사회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극사실주의 화풍에 머물다 끝이 나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재현력을 포기하며 나타난 추상화와 같은 새로운 그림들이 없었다면 ‘그림’이라는 예술은 그저 과거에 행해지던 문화재 같은 느낌의 죽은 예술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또 사진은 그림이 만들고 찾아가는 새로운 영역을 계속해서 뒤쫓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사진의 장점은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한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진 속 배경과 인물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사진의 단점은 스튜디오에서 배경을 만들고 모델과 협력하는 것으로 그 한계를 일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입체파와 같이 비현실적으로 생긴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 찍을 수 없었고, 세상이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과 같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초현실주의 그림과 같은 사진 또한 찍을 수도 없었는데요. 기술의 발전은 디지털 사진 기술을 이용하여 포토샵과 같은 사진을 고치는 도구 혹은 툴을 만드는 것으로 사진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하기 시작했습니다. 흘러내리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니 찍을 수 없지만, 찍어놓은 현실적인 사진을 컴퓨터를 통해 흘러내리는 세상처럼 보이게 만들 수는 있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이런 기술의 발전도 대중들이 사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시선을 물러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듯한 사진이라는 매체가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추상화와 같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아직 무의미한 행위처럼 느껴지니 말이죠. 물론 다중노출 혹은 카메라의 셔터를 장시간 열어놓는 장노출 등의 사진 기술로 사진을 겹치고 빛의 잔상을 담는 등의 시도와 함께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않는 사진들도 시도가 되고 있지만, 결국 사진 속 그 어떤 물체도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추상화 느낌의 사진’이라기보단 ‘망한 사진’이라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진기의 설정을 엉망으로 만들며 아무런 형태가 없는 추상화와 같은 사진을 찍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진기의 설정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의미 없는 행위에 가까운 것이죠. 물론 엉망이면서도 전혀 예술 같지 않은 것을 예술로써 표현하고 사회적인 시선을 바꿔내는 것도 예술가의 역할이라면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재현’이라는 역할을 화끈하게 포기하고 추상의 길을 선택한 앞 세대 화가들의 선택이 정말 탁월하고 대단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화가들에게 참 좋은 변화의 기회를 만들어줬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라 글이 좀 길어지고 있는데요. 슬슬 제 개인적으로 많이 정리되지 못한 부분들이 등장하며 글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잠시 멈추고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해서 다음에 조금 더 꼼꼼하게 정리를 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어쨌든 사진과 그림이라는 달라 보이기도 하고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두 예술, 함께 묶어 생각해보는 것도 은근한 매력이 있는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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