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예쁘지 않지만 아름다운 것.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


작품이라 부르기 조차 애매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거장 ‘마르셀 뒤샹’의 대표작입니다. ‘샘’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으로 예쁘다고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오히려 위생적이지 못하다 느껴지는 화장실에서나 만날 수 있는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어놓은 작품이죠. 이렇게 ‘예쁘다’ 혹은 ‘아름답다’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겉모습을 가진 ‘샘’이라는 작품은 미술관의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전시장에 모셔져 있습니다. 화장실에서는 만질 생각도 하지 않는 변기통에 손이라도 대었다가는 경비원이 총을 겨눌지도 모르는 오묘한 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죠. 심지어 현재 ‘샘’이라고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 작품들은 진품도 아닌 작가 ‘마르셀 뒤샹’의 공인 인증을 받은 17개의 변기통들입니다. 가장 처음으로 사용된 진품 변기통은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진행한 후 분실이 되었고, 1960년부터 뒤샹의 인증을 받은 17개의 복제품들이 그 진품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몇몇 미술관과 전시관에서 이 복제품들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심지어 그 소변기의 종류도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다는 사실도 참 재미있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죠.


어찌 됐든 이런 변기통을 이용한 작품은 각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모아놓는 박물관과 미술관에 아주 귀한 몸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고전미술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각종 우아하고 보기 좋은 고전 작품들 사이에 현대미술의 대표 미술로서 자리 잡고 있는 이 ‘샘’이라는 작품을 보고 있자면 ‘현대의 아름다운 이란 이 변기통인가?’라는 재미난 질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전의 우아하고 예쁜 미술들로 가득 찬 고전미술 전시관을 지나 난해한 현대미술들이 전시되는 현대미술관에 들어와 마주치는 이런 변기통과 같은 전혀 예쁘지 않은 미술품들은 미술이 낯설기만 한 관객들에게 ‘현대미술은 정말 쓰레기 같다.’라는 인식을 주리라는 생각이 상당히 합리적으로 다가오죠.


그런데 또 예쁘기만 한 고전미술을 보면서 일반 관객들이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은 사실 ‘지루함’이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예쁘고 우아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방문하는 박물관과 미술관마다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고전미술은 일반 관객들에게 보면 볼수록 지루하게 느껴지는 오묘한 현상을 만들어내죠. 그리고 이런 지루함은 어쩌면 고전미술의 서로 비슷한 예쁨과 우아함을 더 이상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큰 변화 없이 오직 우아함, 고귀함, 예쁜 겉모습으로 무장한 고전미술은 관객들의 지루함과 함께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되죠. 그런 지루한 작품들 사이에 나타난 ‘소변기’라는 겉모습을 가진 미술작품 ‘샘’은 ‘이게 미술이라고?’라는 놀라움과 충격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지루함을 떨쳐버립니다. 예쁘지도, 고귀하지도, 우아하지도 않지만 고귀하고 예쁘고 우아한 것들만 모여있는 듯한 미술관과 박물관이라는 공간에 놓여 있는 소변기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죠. 


물론 마르셀 뒤샹이 내놓은 소변기 ‘샘’이라는 작품은 당시의 이런 미술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마르셀 뒤샹의 선택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이 ‘샘’이라는 작품의 진품이 사라진 이유도 마르셀 뒤샹이 누구나 참가비를 내는 것으로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전시회에 당시 스타 작가의 명성을 가진 본인의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이 작품을 내놓은 이후 거부를 당한 것이 그 이유인데요. 당시의 미술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란 어디까지인가를 보고 싶어 했던 뒤샹의 의도를 개인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변기라는 극적인 물건을 사용했던 뒤샹의 실험은 ‘개념미술’이라는 생각과 개념을 이용하는 미술에 그 기틀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만약 뒤샹의 이런 파격적인 시도와 함께 ‘개념미술’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미술은 과거에나 이루어지던 과거의 문화 정도로 끝났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전통, 관례 혹은 관습과 같은 이름과 함께 이런 파격적인 시도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미술은 그저 과거의 문화를 살펴보기 위한 유물처럼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팝 음악, 영화, 거대한 비행기와 같은 19,20세기의 급격한 과학 기술 발전과 함께 나타난 거대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들은 이런 고전미술의 지루함을 한층 증폭시키는데요. 오묘하게도 마르셀 뒤샹이 ‘샘’을 내놓았던 이 시기(1917년)는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12초 비행을 성공한 그 시기(1903년)와 큰 차이를 두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시기에 나타난 소변기를 작품으로 내놓는 ‘쓰레기 같은 미술’은 팝 음악, 영화, 거대한 비행기와 같은 새롭고 자극적인 볼거리를 뛰어넘는 아주 신기한 볼거리였죠. 


처음에는 소변기와 같은 미술 같지 않은 작품으로 관객들의 ‘이것도 정말 미술이냐?’라는 생각을 이용하며 자극적인 볼거리를 만들어냈는데요. 소변기라는 물건 자체는 화장실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일상적인 물건이었지만 미술관이라는 생각지도 못 했던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던 소변기는 충분히 자극적인 볼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또다시 이런 생각지 않았던 만남으로 일어나는 자극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혹은 적응하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그래서 미술가들은 생각과 개념을 이용하는 미술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샘이라는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이것도 미술이냐?’라는 생각을 한 것처럼 작품의 겉모습이 아닌 작품 뒤에 숨겨진 생각과 개념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낸다는 개념미술적인 발상을 시작한 것인데요. 물론 소변기처럼 오직 겉모습과 함께 충격을 주는 오직 작품의 겉모습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충격 미술 형태의 작품들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데미안 허스트는 이렇게 상어를 수조에 넣어서 죽음을 이야기했고



채프만 브라더스는 사람을 자르고 이어붙여서 관객들에게 충격을 선사하죠.


이렇게 현대미술은 겉으로 예쁘고 보기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 한 명을 잡아먹을 수 있는 크기’의 상어를 주문하고 수조에 넣는 것으로 관객들이 작품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도록 시도하며 작품 뒤에 개념과 생각을 숨겨두죠. 그리고 관객들은 작가의 의도와 맞게 작품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껴보기도 하고 혹은 모르고 지나친 이후 작품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다시 기억하기도 합니다. 가끔은 채프만 브라더스처럼 작정하고 무섭고 잔인한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아주 단순한 시각적인 충격을 주며 관객의 눈길을 끌기도 하죠. 그리고 이런 겉으로 전혀 예쁘지 않은 작품들은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아름다움으로서 이 시대의 대표작이 되어있습니다. 겉모습은 전혀 예쁘지 않지만 생각과 개념에 대한 깨달음 혹은 시각적인 충격으로 고전의 미술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현대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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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