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정신, 누구도 배고프고 싶지 않다.
- 에세이/미술과 미술가
- 2017. 10. 21. 23:00
귀를 붕대로 감은 1889년 반 고흐의 자화상
더 좋은,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작가들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인내를 감수합니다. 더 좋은 것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미술에서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고통들을 인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에 작가들은 새로우면서도 더 좋은 것이라 생각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생각과 만듦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더 나은 것을 향하며 수반되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거의 모든 분야의 이들이 감수하는 고통과 다른 부분이 아닌데요. 그런데 이런 고통들 중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종류가 존재합니다. 바로 '헝그리 정신'이라 불리는 배고픔이라는 고통을 인내하는 정신을 뜻하는 말인데요. 기본 의식주 중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음식조차 살 돈이 없어 힘든 상황이어도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버텨내야만 한다는 뜻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음식이 풍요롭고 돈이 많은 것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자해적인 정신마저 들어있는 듯한 느낌의 말이죠.
순수미술이라는 불안한 길에 들어서며 한때 저에게도 ‘이거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순수미술은 저에게 너무나 흥미롭고 항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지만 대학시절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참 불안함 마음이 많이 드는 분야이기도 했죠. '그럼 앞으로 뭐 해서 먹고 살거냐?’라는 지인들의 물음에 시원한 대답이 존재하지는 못해 대답을 회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당시 런던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던 외국인 친구들에게 이와 같은 고민을 이야기하며 한국의 '헝그리 정신'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요. 모두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며 '헝그리 정신’이라는 단어는 오직 한국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좋은 작품에 대한 기준이 없다고 말하는 미술에서 그나마 사회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작가와 작품의 유명세입니다. 어쩌면 성공하고 싶은 작가들에게 작품이란 성공한 다른 이의 작품과 앞으로 성공했으면 하는 자신의 작품이 존재하는 것인데요. 배고픔을 인내해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헝그리 정신'에 따른다면 당연히 예술적 지원이 부족한 국가의 나라들에서 높은 명성의 작가와 작품이 많이 나와야 하지만 실상은 예술적 지원이 탄탄한 국가의 작가와 작품들이 세계 시장을 독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이는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만 배고픔이라는 고통이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예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듯한 '헝그리 정신’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면 최소한 한국은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겠죠.
그렇다고 해서 국가적으로 미술인들에게 최소한 배고프지 않을 지원을 해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배가 고파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으니 배고파도 괜찮다.', '그들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 배고픔을 선택한 것이다.'라는 최소한의 생활마저 포기해도 괜찮다는 시선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헝그리 정신이란 모두가 배고프고 어려웠던 시절 더 이상 배고프지 않기를 원했던 강인한 정신을 뜻했던 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느새부터인가 미술에서 이 말은 돈을 좇는 미술가는 좋은 미술가가 아니라는 어감을 가지며 작가의 배고픔은 당연한 것이라는 시선이 되었죠. 그런데 어쩌면 미술가들의 배고픔은 순수한 열정을 지녔던 미술가들을 돈을 쫓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생전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즐겼던 파블로 피카소
가끔은 배고프고 힘든 삶을 통해 만들어낸 작품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 이후 인정받았던 반 고흐라는 대가의 예를 들며 현재의 고통을 통해 죽음 이후 미래의 성공을 기약하는 모습도 보이는데요. 반 고흐는 대가임이 분명한 예술가이지만 힘든 삶을 겪었던 대가의 한 예일뿐 대부분의 대가들은 생전 큰 명성을 누리며 부유한 삶과 함께 다양한 활동과 작품을 남겼습니다.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그림을 그렸던 오랜 과거 속의 미켈란젤로, 다빈치와 같은 대가들부터 현대에 들어 생전에 이미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피카소와 같은 대가들처럼 말이죠.
현재의 배고픔이라는 고통은 가끔 어쩔 수 없이 인내해야 하는 과제일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시작점이 다른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모든 신진작가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배고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는 사회적인 조치와 시선의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이를 방치하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고쳐져야 할 문제이겠죠. 오직 좋은 작품이 존중받고 보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물건과 상품이라는 것에서 사회는 누구보다도 잔인하니 말이죠. 하지만 오직 소수의 인정받는 작가만이 존중을 받으며 새롭게 이를 시작하는 신진 작가들에게는 최소한의 삶의 기준인 배고픔이 당연시되고 있는 이 모습을 그저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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