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좋은 선택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작품을 만들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무엇을 그릴지 또 어떻게 그릴지를 선택하는 것과 함께 작품을 시작하는데요. 이후 화가는 또 어디서 그림을 그리고 어디서 그림을 끝마칠지 선택해야 하는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심지어 위와 같은 요상한 양동이를 만들면서도 작가는 두 개의 양동이를 붙여버린 체 황동을 부어버리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요. 이런 요상한 양동이를 만들고 나서는 또 ‘노란색의 8(Yellow 8)’이라는 제목마저도 선택해야 하죠.



심지어 간단해 보이는 사진이라는 예술도 비슷합니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사진으로 찍을지를 결정해야만 하는데요.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그저 거리를 돌아다니며 우연한 기회를 찾아 헤맬 것인지 혹은 스튜디오에서 배경을 만들고 배우를 이용하여 원하는 상황을 연출하여 찍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미술, 음악, 영화, 연극 등등 모든 예술 분야의 제작자들은 늘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선택에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택한 좋은 선택은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당연하겠죠.


그렇다면 여기서 들 수 있는 의문은 ‘예술가들의 이런 선택에 대한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교육이 가능한 것인가?’와 같은 ‘좋은 선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좋은 능력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기에 그 명확한 해석과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요. 명확하지 못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 해석과 기준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죠. 이처럼 ‘좋은 선택’이란 다양한 해석과 기준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그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조차 섣불리 ‘좋은 선택이란 이것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하나의 해석과 기준을 제시하기란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인데요.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믿고 있는 좋은 선택에 대한 해석과 기준을 말씀드려보기 전에 최악의 선택처럼 보이면서도 참 좋은 선택 같기도 한 재미있는 작품 하나를 먼저 보여드리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예술가의 똥’이라는 정말 좋지 않은 것만 같은 제목 선택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하지만 이 작품을 조금 더 살펴보고 있자면 정말 작가의 선택이 최악이면서도 최고였다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들게 되는 아주 오묘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바로 60그램의 신선한 똥이 들어있다고 적혀있는 통조림의 겉모습을 가진 작품 ‘예술가의 똥’입니다. ‘피에로 만초니’라는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인데요. ‘너의 작품은 정말 똥같이 쓸데없어!(Your work is shit.)’라고 말한 아버지의 말을 듣고는 실제 사람의 대변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는 후문이 존재하기도 하는 작품입니다. 또 작품에는 작가 ‘피에로 만초니’의 재치가 돋보이는 다양한 선택들이 숨어 있는데요. 사실 이 작품은 현재까지도 통조림 내부에 실제 사람의 분변이 들어있으냐 혹은 분변인 척하는 석회 반죽이 들어가 있느냐에 대한 진위 여부로 사람들의 궁금증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61년에 총 60개의 통조림이 만들어졌지만 현재까지 오픈된 통조림은 단 하나에 불과한데요. 한 개의 통조림이 오픈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그 진위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통조림 안에 작은 통조림을 하나 더 넣어놓은 작가의 괴상한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캔 하나에 1억 4천만 원(97,250 파운드)의 가치를 가져버린 작품을 오픈한다는 것은 어쩌면 훼손의 과정일 수 있기에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던 행위였는데요. 그렇게 큰 용기와 함께 오픈된 캔에서 나온 또 다른 캔의 존재는 굉장히 당황스러운 돌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캔에서 나온 작은 캔은 오픈되지 못한 채 아직도 캔 안의 내용물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가고 있죠. 그리고 이런 궁금증이 커져갈수록 작품의 가격은 점점 더 오르고 가격이 오를수록 캔을 열어보는 것에는 점점 더 큰 용기가 필요해지는 재미난 현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똥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든다는 그 선택도 참 과감하고 대단했지만, 캔 안에 또 하나의 캔을 넣어놓는다는 그 선택이야말로 현재까지 이 작품을 큰 관심의 중심에 놓이게 해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미술이란 어쩌면 간단하게 ‘아름다움’을 쫓는 인간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똥’이라는 존재는 그 말만 들어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죠. 그럼에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똥이라는 존재를 미술의 재료로써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똥과 아름다움이라는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존재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현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미술의 모습을 굉장히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아름다움으로서 만들어졌던 많은 아름다운 작품들은 현재에도 박물관과 미술관에 남아 관객들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본 관객들에게 현대의 젊은 작가들이 또다시 과거의 아름다움과 같은 혹은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 보여준다면 관객은 당연하게도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루함은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무관심은 잊혀짐을 초래하죠. 문화에게 잊혀짐이란 단어는 어쩌면 멸망과 사라짐을 뜻하는 치명적인 단어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유들과 함께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예술가의 좋은 선택이란 바로 ‘기억에 남는 것’인데요. 새롭고 인상적인 작품은 관객들의 기억에 남아 미술의 생존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믿고 있죠. 사실 예술가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선택 중의 좋은 선택이 ‘기억에 남기 위한 선택’이라니, 그 예술가의  좋은 선택이라는 의미의 범위가 상당히 방대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미술 안에서 만해도 그림 그리는 화가와 사진을 찍는 사진가는 자신의 미술을 위해 필요한 선택의 과정이 굉장히 다르기도 하니 말이죠.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선택들은 관객들 앞에 내놓아져야 한다는 결과를 바라보며 진행되는 큰 선택의 과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술가 각자의 매체에 따른 작은 선택들은 잠시 접어두고 작품을 만들어 관객 앞에 내놓는 큰 선택의 과정에 집중해보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들기 시작하는 또 다른 의문은 ‘그렇게 살아남은 미술이라는 문화는 무엇을 위한 것이냐?’인데요. 사실 조금 무책임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을 내놓을 역량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잊혀지지 않고 살아남아야 좋은 역할과 기여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는 어느 정도 확신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혹은 살아있는 문화로서 사회에 남아 관객이 일상에서 할 수 없는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문화의 기능이자 역할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어렴풋이 들고 있습니다. 결국 예술가가 믿는 좋은 선택이 작품을 만들고 관객이 믿는 좋은 선택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의 생생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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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