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이다. (드레)
- 방송/새라 미술 이유식
- 2018. 4. 16. 16:08
* 아래는 라디오의 내용을 한 번 더 편집한 글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말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새라 미술 이유식을 진행하고 있는 도니, 이동준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인사를 드리는데요. 사실 라디오를 함께 해주던 취업준비생 컨셉의 심군이 아주 갑작스럽게 취업이 되어버리면서 라디오가 잠정 중단 사태에 이르렀었습니다. '새로운 멤버를 찾아야 하나…' 와 같은 고민을 하다 보니 색다른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해, ‘일단은 다시 시작할 때를 준비하며 공부를 하고 있자…’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꽤 오래 보낸 것 같은데요. 결국,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 '혼자 독백으로 청취자분들에게 미술 이야기를 들려드려보는 것은 어떨까'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었습니다. 사실 생각한 지는 조금 오래되었는데 마이크 앞에서 혼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다는 것이 보통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새 출발 한다는 느낌으로 음악도 한 번 새롭게 깔아보았습니다. 최근 이름도 새라 미술 이유식으로 바꾸며 몇 번을 새 출발 한다고 말씀드리는지 조금 민망하기도 하지만, 늘 새롭게 출발하다 보면 나아지는 부분들이 있겠죠…? 이제 갓 신입 회사원이 된 심군이 많이 바빠 시간을 맞추기가 힘든 상태이기도 한데요. 최대한 한 번 불러내어 마지막 인사라도 한 번 드릴 수 있는 시간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동안 잡담이 너무 많다.' '웃음소리에 정신이 없다.’라는 청취자 의견을 듣고는 했는데요. 이렇게 혼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쩌면 나름대로 이런 의견들을 반영하는 새로운 방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이렇게 새로운 도전으로 혼자서 진행하는 라디오를 한 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일반적이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하는데요. ‘일반적이다.’라는 단어는 미술에서 상당히 재미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 아름다움을 찾아 헤메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아름다움.’에는 특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아 늘 시대에 맞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에 맞게 변해가는 아름다움이란 각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들과 연관이 있으면서도 어쩌면 아름다움 자체가 일반적인 예쁨과 미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평균을 뜻하는 듯한 '일반적이다.’라는 단어와 최고를 지향하는 듯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죠. 이렇게 모호함이 가득한 '일반적이다.’라는 단어를 파헤쳐보기 위해 현재 이 시대의 우리가 가진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부터 살펴보면 흥미로운 접근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중국의 작가 아이 웨이웨이는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의 미술에 대한 시선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는데요. ‘사람들은 미술에 대해 너무나 많은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아이 웨이웨이). 저는 개인적으로 현재 시대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은 바로 이 아이 웨이웨이가 말했던 ‘판타지’라는 단어가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에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이 일반 관객이 미술에 대해 가지는 '판타지'의 베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독일의 한 철학자는 미술이 가진 길고 긴 역사가 미술이 가지는 숭고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길고 긴 역사를 통해 갈고 닦이며 특별해지고 숭고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오래되었다는 그 시간적인 특징으로 인해 특별해 보이고 숭고해 보일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죠. 혹은 아주 먼 과거 기우제를 지내는 제례의식 등에 사용되던 그 오래된 본능적 기억들과 과거 왕국, 교회, 절 등 지배 계층의 거주지나 그들을 위한 건물들에만 존재했다는 그 당시의 특별한 공간에 있었다는 이미지들이 지금까지 남아 현재까지도 미술이라는 것이 특별해 보이고 숭고해 보이는 이미지를 가졌다고 말하는데요.
오랜 시간이라는 역사가 만드는 미술이 가지는 판타지와 같은 이미지는 사실 오직 관객만이 가지는 일반적인 시각은 아닙니다. 사실 미술을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미술은 오랜 시간과 역사를 가진 문화이기도 한데요. 미술 안에서 관객과 작가를 완전히 다른 객체로 나누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작가도 자신의 작품을 제외하면 다른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에 불과하기도 하니 말이죠. 이처럼 ‘일반적인 시각이라는 것은 작가, 관객, 미술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등 일부 사람을 위한 혹은 일부 사람을 제외한 것이 아닌 사회 전체의 의견에 가까운 것이죠.
러시아의 역원근법 이미지
사회 전체가 가진 의견이라고도 생각되는 ‘일반적이다.’라는 말을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로는 원근법과 역원근법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는 이름 그대로 일반적인 원근법과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그림 속에 거리감을 표현하는 그들만의 원근법인 ‘역원근법’이 존재했는데요. 일반적인 원근법은 가까운 것을 크게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을 작게 그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과거 러시아에서는 보통 사물들을 그릴 때는 일반적인 원근법을 사용하면서도 일직선의 단면을 가진 사각형 형태의 물건을 그릴때는 그 모습이 완전히 거꾸로인 형태를 보여주는 역원근법을 사용했었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곁들여보자면 일반적인 원근법은 한 곳에 서서 보았을 때의 방식으로 거리감을 표현한것이고 역원근법은 물건을 왼쪽과 오른쪽에서 두 시점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거리감을 표현한 것인데요. 이 부분은 그저 음성으로만 설명하기엔 모호한 부분이 많고 이 회차는 그저 ‘일반적이다.’라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니 당시 러시아 사람들이 이 역원근법을 일반적인 시선으로 받아들였다는 부분만을 이해하며 이야기를 이어 가보겠습니다. 이 ‘일반적이다.’라는 주제에서 이 원근법과 역원근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근법을 일반적이라 생각하며 ‘반’원근법에 대해 ‘일반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한 것인데요. 어쩌면 원근법에 반대되는 모습이라 느껴지는 반원근법을 일반적인 원근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옛 러시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일반적인 원근법이 당시 러시아 사람들의 원근법에 반대되는 모습을 가진 반원근법이 되기도 하니 말이죠.
이런 관점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는 의문은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친근하고 일반적으로 보이는 원근법이 반원근법을 사용하던 옛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졌을까?'라는 부분입니다. 이는 일반적이라 느끼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익숙함에 대한 의문이기도 한데요. 러시아의 반원근법을 조금 더 알아보면 이 익숙함이라는 요소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가지 더 발견됩니다.
사실 러시아의 역원근법은 오직 그림 안에서만 사용되었다는 특징이 존재하는데요. 조각과 같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표면 자체가 울퉁불퉁한 입체적인 표면을 가지고 있으면 당시 러시아에서도 현재의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특징이 존재합니다. 간단하게 말해 역원근법이란 그림처럼 평평한 표면을 가진 이미지를 입체적인 표면처럼 보이게 해주는 당시 옛 러시아의 사회적인 약속이기도 했다는 것인데요. 역원근법이란 어쩌면 그림 속의 거리감을 표현해주는 원근법으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림을 외적으로 그저 평평한 그림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요소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원근법과 반원근법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사용했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사실과 함께 드는 개인적 의문은 바로 이렇게 사회적인 약속처럼 존재하는 듯이만 느껴지는 ‘반원근법’이라는 존재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원근법과 역원근법이 가지는 둘 사이의 괴리감을 익숙함에 묻혀 느끼지 못했을지 혹은 그 괴리를 알면서도 그러려니 지나간 것인지가 참 해결할 수 없는 의문처럼 느껴지는데요. 이 의문이 점점 미궁으로 빠지게 만드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일반적인 원근법만을 평생 보고 자라온 제 자신의 눈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의 그림 휘슬자켓(Whistlejacket)
이처럼 현재라는 시대와 시간의 환경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보는 것에 익숙함을 느끼고 있는 제 눈은 과거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눈을 이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처럼 느껴지는데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미난 사례가 존재합니다. 바로 원근법과는 조금 다른 명암이라는 요소에 대한 사례인데요. 그림 속 물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표현해주는 것이 원근법이라면 그림 속 물체의 입체감을 표현해주는 요소는 바로 명암입니다. 이 ‘명암’에도 어쩌면 거리감을 표현해주던 ‘원근법’과 같은 익숙함의 요소가 숨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례가 존재하는데요. 바로 평생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원주민에 대한 사례입니다. 한 BBC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앞발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한 말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휘슬자켓'이라는 그림을 평생 그림이라는 이미지를 접해본 적이 없는 원주민들이 이를 '말을 그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고 소개했는데요. 이 사회 속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끼는 그림, 이미지라는 것들이 이 사회와 단절된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을 떠나 애초에 인식조차 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부분을 느끼게 해준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죠.
어쩌면 현재 너무나도 역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말 그림 조차 어려서부터 그림 속 명암들에 자연스럽게 훈련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부분이었는데요. 너무나 친근하여 그저 '일반적인 것이다.’라는 표현을 넘어 '지구에 중력이 존재한다.' 와 같이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그림 속의 거리감을 표현하는 원근법, 입체감을 표현하는 명암 등이 오랜 시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익숙함’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부분은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에 가까운 사실이었습니다. 또 이 사실을 조금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오랜 시간 이 사회의 이미지에 훈련된 제 자신의 눈이라는 사실 또한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롭게 느껴지는 사실이었죠. '일반적인 이미지를 보는 눈'에 대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일반적인 이미지를 보지 못하는 훈련되지 못한 순수한 눈이니 말이죠. 원근법, 명암과 같이 일반적인 이미지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가진 '익숙함'을 조금 더 알기가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답은 어느정도 알고 있지만, 그 방식을 풀어내기가 힘든 미궁에 가까운 모습인 것이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Venus of Willendorf)
이처럼 원근법과 명암이 가진 '일반적이다.'라는 부분은 그 미궁의 깊이가 참 깊지만, 또 '일반적이다.'라는 요소를 이야기하면 빠질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부분은 일반적인 아름다움의 그 선과 기준의 변화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과거 미인들을 표현한 조각상, 그림들만 보아도 그 변화를 아주 간단하게 느껴볼 수 있죠. 가장 긴 시간 전의 미인이라고도 표현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은 기원전 2만 5천 년 정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조각상인데요. 현시대 여성의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풍만한 몸과 가슴이 특징인 조각상입니다. 사실 문자가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의 물건인 만큼 그 당시 사람들의 증언이나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은 출산율이 높아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추정하며 건강하게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풍만한 몸과 가슴이 미의 기준이 되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는데요. 당시의 미의 기준이 과장되어 이 조각상에 표현되었다는 것이죠.
또 중국, 한국, 일본 등 과거 동양화들에 그려진 미인들은 동양의 고고한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이 시대의 이상적인 미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진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인데요. 또 다른 부분으로는 현대의 문화권 안에 있지 않은 오지의 부족민들이 가진 그들만의 미적 기준들도 이러한 각 사회가 가진 각 사회의 일반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좋은 예이죠.
가끔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가진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여 과거의 미적 기준들 혹은 오지의 미적 기준들을 그 사회들의 경제적 환경들과 부합시키며 발전되지 못한 아름다움 혹은 미개한 미적 기준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존재하는데요. 과거의 아름다움과 오지의 아름다움이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과 다른 이유는 어쩌면 우리는 그저 각각 다른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우리는 원근법을 사용하고 과거의 러시아는 원근법과 역원근법을 함께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과 같은 모습처럼 말이죠. 현대라는 시간과 사회에서도 각 사회는 각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서로에게 '이국적이다.'라고 느끼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다만 우리는 발달한 정보 기술과 함께 비슷한 이미지들에 익숙해지며 통일감 있는 아름다움을 가져버린 것이죠.
이처럼 이 ‘일반적이다.’라는 단어는 사람이 얼마나 사회적인지를 보여주는 단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만의 생활 속에서 나에게는 아무리 익숙한 행동이라고 한들 그 행동이 오직 나에게만 익숙한 것이고 사회로서는 낯선 것이라면 그 행동이 사회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행동은 아닐 테니 말이죠. 물론 현시대는 그 행동이 오직 나에게만 익숙하고 일반적이라 하여 사회에게서 배척당하지는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행동이라면 나 자신을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에 맞출 필요는 없게 된 것이죠. 나에게 일반적이냐, 사회적으로 일반적이냐 라는 두 가지의 말처럼 '일반적이다.’라는 단어는 그 주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재미난 단어인 것 같네요.
이처럼 ‘일반적이다.’라는 말은 친근한 단어이지만 그 친근함에 비해 아주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일반적이다.'라는 글처럼 우리 일상에서 아주 친근하게 사용되지만 생각해보면 참 다양한 부분들을 심오하고 깊게 담아내고 있는 것들을 좋아하는데요. ‘일반적이다.’라는 단어는 그중에서도 미술가에게 참 다양하게 생각해볼 거리를 제공해주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아름다움, 일반적인 미적 기준, 일반적인 원근법, 미술에 대한 관객들의 일반적인 시각 등 미술은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많은 요소로 인해 일반적이라는 단어를 함께 붙여놓으면 모호하게 생각해볼 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단어가 완성되는 것 같은데요. 미술사학자로서는 이 모호한 일반적임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미술가로서는 자신의 작품이 일반적이지만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인 그림을 그리고 일반적인 조각을 하고 일반적인 일러스트를 그리는 예술가는 어쩌면 그저 일반적인 예술가에 불과할지 모르니 말이죠.
또 어쩌면 현시대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현시대의 사람들에게 새로움이라는 느낌을 남기고 기억에 남으며 다음 시대에 이를 ‘일반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미술가가 가진 또 하나의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존재하지 않는 새로움을 다음 시대의 일반적인 아름다움이자, 미의 기준이자, 시각이자, 미술로써 만들어내는 것. 예술을 하는 이로써 정말 해내고만 싶은 일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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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라디오를 진행해본다는 게 참 새로운 경험인 것 같은데요. 진행이라는 표현보다는 열심히 말한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에세이를 열심히 쓰며 그 생각들을 종합해서 새로운 생각을 내보는 방식으로 최대한 자주 찾아뵙도록 노력해보려고 하는데요. 역시 늘 이렇게 말씀은 드리지만 결국은 천천히... 꾸준하게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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