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벽의 갤러리 (드레)


* 아래는 라디오의 내용을 문어체로 한 번 더 편집한 글 입니다. *

안녕하세요, 새라 미술 이유식을 진행하고 있는 개념미술가 이동준, 도니입니다. 오늘은 '하얀 벽의 갤러리'라는 주제와 함께 미술 작품을 위한 공간에 대한 부분들을 풀어내 볼까 하는데요. 미술 작품과 늘 함께하는 '전시 공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재미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전시 공간이라는 말을 듣고 쉽게 떠올리는 ‘갤러리’라는 공간은 약 300여 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300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만약 인류가 동굴에 그림을 그렸던 기원전의 시기를 미술의 탄생 시점으로 잡는다면 이는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로 짧은 시간인데요.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지는 미술을 위한 공간인 ‘갤러리’라는 공간이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미술이 오랜 시간 동안 공간을 위해 존재하는 위치에 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미술이 화이트 갤러리라는 공간을 얻으며 독립적인 모습을 갖춘 것은 몇 만 년이라는 거대한 미술의 역사 중에서 30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과거 미술이 전시되던 공간이란 소수의 지배 계층을 위한 공간에 한정되었는데요. 간단하게는 왕궁, 귀족의 집과 같은 지배 계층의 건축물 혹은 교회, 절과 같은 종교 건물이 과거 미술이 전시되던 대표적인 공간이었죠. 사실 이 당시의 작품이라는 존재는 특정 건물을 꾸며줄 가구에 가까운 쓰임새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혹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인 경우도 많았는데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은 거대하고 웅장하며 대단했지만, 그 뒤에는 그런 작품들을 위한 시간과 자금을 제공해주는 왕과 귀족과 같은 당시의 시대를 지배하던 소수 계층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있었던 것이죠. 당시 소수 지배 계층의 지원과 함께 독립적이지 만은 않은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작품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대의 갤러리에 전시되는 작품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예이죠.

사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미이라는 단어, 영어로는 '아트(Art)'라고 말하는 이 단어의 진정한 시작은 1800년대 정도부터라고 이야기되는데요. 갤러리와 박물관을 방문하여 작품을 바라보고 하는 행위를 떠올리기 쉬운 현재의 '미술'이라는 단어가 가진 이미지는 미술이 가진 역사에 비해 형성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미지인 것이죠. 사실 미술은 오래전부터 종교적이었고, 국가적이었고, 귀족적이었습니다. '미술적이다.'라는 단어보다는 그 당시의 미술이 보여주고 있던 것들에 비유한 단어가 더 어울리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죠. 이런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던 미술이 '미술적인 미술'을 보여주기 시작한 시기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1800년대 정도부터인데요.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갤러리'라는 공간이 나타난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시기이기도 하죠.

현재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흰 벽에 둘러싸인 전시 공간, '화이트 갤러리'는 미술이 가진 환경에서 거의 필수적이라 느껴지는 부분인데요. 이 흰 벽의 공간은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작품에는 굉장히 큰 자유로움을 제공해주는 공간입니다. 과거 교회, 절 등에 자리 잡고 있던 미술품들은 그 공간에 있어야만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요. 교회에 세워져 있던 예수상이 절에 세워져 있는 모습을 떠올렸을 때 다른 큰 설명 없이도 이를 부자연스럽다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그 반대로 절에 있던 부처상이 교회에 자리를 잡아도 그 부자연스러움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서로의 공간에서 부자연스러움을 가지던 두 예술품을 현대의 갤러리 공간으로 가져오면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는데요. 서로가 흰 벽의 갤러리 안에서 마주 보고 있어도 종교예술을 전시하는 심오한 전시회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 시작합니다. 부처상이 교회에, 예수상이 절에 부자연스럽게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백지 같은 상태’라는 언어적인 표현이 있는 것처럼 ‘하얗다.’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에는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라는 의미 또한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처럼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하얀색의 벽에 둘러싸인 미술의 새로운 전시공간은 공간 자신보다는 공간에 놓인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데요. 공간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놓은 물건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죠. 이 부분이 앞서 말한 미술, Art라는 말의 의미가 1800년대부터 어떠한 새로운 의미로 쓰이게 됐는지를 느껴볼 수 있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인공이 되었다.'라는 말이 이 의미를 설명하는 말인 것 같은데요. 세상에 대한 독립을 의미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을 위해, 귀족을 위해, 혹은 건축물이나 공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미술을 위해 미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1800년대 이후 갤러리라는 공간의 등장 이후부터인 것이죠. 사실 미술의 겉모습 자체가 많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조각되고, 만들어지는 과거의 전통미술과 크게 다른 모습을 가진 것은 아니죠. 다만,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이 쉬는 시간을 즐기는 모습 안에도 자유라는 환경이 주어진 현재와 과거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드는 것과 같은 요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하면 안 되는 것들을 했을 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느냐 혹은 실험으로 취급받느냐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자유라는 것이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는 참 일상적이지만, 없었던 시절의 세상은 꽤 살벌한 뒷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미술인들에게 자유를 만들어준 흰 벽의 공간은 관객들에게는 또 다른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흰 벽의 공간 속에서 주인공처럼 놓인 물건을 마주한 관객들은 흰색의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작품을 마주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긴장하기 시작하는데요. 환경이 만들어주는 관객의 이런 심리는 일상에서 평범하게 사용하고 마주치던 물건들도 괜스레 특별해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한 미학자는 관객이 거의 공포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기도 한다고 표현하는데요. 사실 낯선 공간 중에서도 미술품이 놓이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관객을 조용하게 만들고 평소보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하도록 만들기도 하죠.


이러한 화이트 갤러리의 흥미로운 현상을 우리들이 한 번씩은 접했을 법한 해프닝과 함께 생각해보고 파악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현대미술관에서 벌어졌던 일인데요. 17살의 십 대가 전시장 한쪽에 안경을 내려놓는 장난을 벌이며 벌어진 재미난 해프닝이었죠. 사람들은 17살 십 대의 장난으로 전시관 한 켠에 놓인 의미 없는 안경을 조심스럽게 지나며 관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이와 같은 모습은 ‘안경을 하나 내려놓아도 사람들은 이를 작품으로 본다.’라는 생각과 함께 미술은 결국 의미 없는 것이라는 조롱의 요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도 기사화되며 국내의 많은 분이 이 소식을 접할 수 있었죠. 실제로 재치있는 조롱과 희화화와 함께 SNS에서 많은 공유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요. 이런 조롱과 희화화에는 미술에 대한 관객들의 답답함이 담겨있다고도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관객의 답답함은 이 사건과는 조금은 별개의 것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장난으로 내려놓은 안경을 작품이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관람을 했다.’라는 사실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데요. 첫 번째는 현실을 다르게 보여주는 화이트 갤러리라는 공간의 힘이면서, 두 번째는 '갤러리라는 공간 안에서는 현실과는 다른 것을 볼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의 기대감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관객들에게 전시 공간 안의 물건들은 일상의 평범한 물건이라 하여도 심하게는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새롭게 다가오는 물건들입니다. 사실 그것이 안경이라 한들 심지어는 안전을 위해 가져다 놓은 소화기라 한들 ‘이것도 미술이려나?’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지나치게 긍정적인 생각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화이트 갤러리라는 전시 공간은 어쩌면 평소 우리가 사는 환경을 모두 하얗게 칠해버리고는 오직 공간 안에 놓인 물건에 집중하며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17살 아이의 장난과 함께 놓인 물건이라 해도 말이죠. 전시 공간 안에 있는 순간의 짧은 시간 만큼은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평소와는 다른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며 여유와 여가를 즐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17살의 아이가 장난으로 놓고 간 안경이 관객들에게 미술가들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지 않은 답답한 작품들로서 받아들여 진다는 것은 화이트 갤러리라는 특별한 공간 안의 작품들에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해주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 관객들에게 답답함을 안겨주는가.’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요. 사실 이 부분을 탁월하게 해결할 해결책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한 아이의 장난인 안경마저도 진지하게 바라봐주는 관객을 향해 작품을 내놓는 예술가들은 상당한 책임감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데요. '어린아이의 안경과 예술가의 작품이 차별화를 가질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결하면 예술가로서는 작품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으로는 만약 이와 같은 혼란이 계속된다면 안경마저도 작품으로 봐주던 관객들의 신뢰가 많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함께 들면서 말이죠.

교회, 절에 안경이 놓여있다면 이는 누군가가 놓고 간 분실물로 받아들여 졌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와 같은 공간에는 그 공간에 맞는 형식의 작품들이 존재했으니 말이죠. 이처럼 미술가들에게 배경에 맞출 필요가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해준 화이트 갤러리는 그 거대한 자유에 맞는 책임을 미술가들에게 함께 준 것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를 하고 있지만, 전시회와 공간이라는 것은 작품을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습니다. 또 늘 어떤 작품을 해야 하는지, 어떤 전시를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에는 화이트 갤러리를 가지게 된 이 미술의 변화가 미술가에게 가져다준 행복이자, 고통이자, 책임인 것 같기도 하네요.

역시나... 미술이라는 것이 참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요. 정말 미술이라는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고는 '미술이 이렇습니다!'라고 통쾌하게 설명할 방법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또 과거 공간에 맞춰 정형화된 미술이 지루해지는 느낌을 가지는 것처럼, 만약 현재의 미술도 정형화되며 통쾌하게 정리되어 버린다면 조금씩 조금씩 지루한 느낌이 들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아이러니한 생각도 드는 것 같네요.

음... 오늘 준비한 '하얀 벽의 갤러리'는 여기까지이고요. 모든 새라 미술이유식 회차들은 도니닷컴에 글과 함께 정리하고 있으니 혹시 글과 함께 보시고 싶은 분들은 방문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정보란에 적어놓은 이메일을 통해 다양한 부분들을 질문해주시고 문의해주셔도 되니까요. 언제든지 재미난 미술 이야기와 질문들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또 빠르지는 못하지만 꾸준함으로 승부하며 재미난 미술 이야기들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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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