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의 관점으로
- 에세이/현대미술
- 2015. 11. 29. 09:15
어린왕자를 읽다 보면 어린왕자가 어른들의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집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들어보고 그 가치를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비싼 가격을 듣고 '정말 좋은 집이겠구나.'라고 말하는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어른들의 현실적인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인데요. 어린왕자가 말했던 어른들의 이런 시선은 예술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을 보고 개인적인 가치를 판단하기 보다는 그림의 가격을 듣고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처럼 말이죠. 사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일반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름답다.' 혹은 '예쁘다'라는 말을 듣기 어려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카소의 그림 앞에서 '내 취향은 아니네.'라고 말하지 않죠. 본인이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여기저기서 들었던 피카소의 명성과 작품 가격 그리고 큐비즘이니 입체파니 하는 일반인으로서는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미학적인 부분들을 떠올리며 침묵합니다. 내가 그 그림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보다는 사회가 정해놓은 틀과 가치에 갇혀서 그림을 생각하는, 어찌 보면 '어른이 되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습이죠. 우리는 유난히 어려워 보이고 고상해 보이는 미술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듯 하는데요, 실수를 하며 틀리는 것을 무서워하는 '어른'이라는 중압감 있는 사회의 역할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미술 작품 앞에서 진지해지고 말이 없어지며 어른의 모습을 유지하는 이유는 미술 앞에서 꼭 무엇인가를 느끼고 작품을 해석해야만 할 것 같은 미술이 주는 특유의 중압감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은 언제나 취향이라는 것을 가지고 개인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정하는 것일 뿐인데 말이죠. 개인이 좋아하는 음악이 모두 다르듯 개인이 좋아하는 미술도 모두 다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모든 사람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음악은 없듯 세상에는 역시 모든 사람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그림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팝 음악을 좋아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피카소의 그림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좋아하는 것이죠. 또 누군가는 피카소의 그림과 취향이 정말 잘 맞아 좋아할 수 있듯, 만약 피카소의 그림이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면 '뭐 이리 사람을 이상하게 그려놓았나.'하며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도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200억, 300억을 가볍게 넘는 거대한 가격이 주는 중압감은 참 오묘하지만 말이죠. 하지만 집에서 시켜 먹는 짜장면이 호텔에서 먹는 고가의 자장면보다 더 취향에 잘 맞고 더 맛있다면 저렴한 가격에 더 좋은 맛을 경험한 더 효율적이고 더 가치 있는 경험이지 않을까요.
그 예가 조금은 애매모호한 듯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가끔은 작품의 뒤를 따라다니는 가격과 같은 부분들은 잠시 떨쳐버리고 어린왕자의 관점으로 미술품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돈과 가격 그리고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미술 어휘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춰 생각해보는 그런 개인적인 가치 같은 것과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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