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스크를 가지고 계신가요? (Which mask do you have?)

영국에서 파운데이션 코스를 통해 순수미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기 약 2개월 전 파인아트와 굉장히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일러스트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단 7개의 일러스트 밖에 없는 아주 짧고 간결한 프로젝트이지만, 일러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당시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은근한 순수미술의 성향이 보이는 프로젝트죠.


이 일러스트 프로젝트는 유학을 위한 출국을 기다리며 잠시 했던 아르바이트 중 체험한 경험을 토대로 그려졌습니다. 이모님이 운영하시는 비영리단체의 여성 장애인 인력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로 약 한 달 정도 일을 도와드렸는데, 여성 장애인분들의 취업을 돋기 위한 장소이니 당연히 많은 여성 장애인분들과 많은 접촉을 해야만 했던 아르바이트였죠. 교육을 받으시는 분들이 사용하시는 컴퓨터와 프로젝터들을 설치하고 고치는 일명 잡일을 보고 있었으니 더더욱 많은 접촉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어릴 적부터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시는 이모와 이모부의 일손을 도운 적이 많아 몸이 불편하신 분들과의 접촉이 새롭거나 긴장되는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아주머니들과 같은 푸근함으로 쉽게 친근해지고 속을 금방 들어내놓으시는 인간미적인 부분들로 '젊은 총각'이라 불리며 지내는 것이 꽤나 유쾌한 일상이었죠. 그런 평범한 일상 중에 어쩌다 찾아온 문제는 인력센터에서 가장 높은 분이셨던 이모님과 저의 가족 관계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찾아옵니다. 잡일하는 총각쯤으로 생각하며 저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시던 분들이 저의 가족 관계를 알고 난 후 지어주시던 어색한 웃음은 참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죠. 이때 들었던 짧고 묘한 감정을 통해서 짬짬이 그려낸 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의 일러스트들이었습니다. 짧고 간단했던 감정만큼이나 딱 7장을 그리는 것으로 끝이 난 이 프로젝트는 사실 프로젝트라고 말하기에는 그 규모가 좀 작은 프로젝트죠.



7장의 일러스트 중 일부의 일러스트들


어쨌든 그렇게 그려낸 7개의 일러스트들은 모두 이렇게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데요. 사실 그분들의 변화가 당시 일이나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갑자기 변해버리신 그분들의 표정이나 모든 것들에 조금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은근히 저를 불편해하시는 그분들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은근히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느낌이었죠. 원래부터 친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얼굴 볼 일 없는 남남이 된 것 같은 느낌과 비슷하달까요. 어쨌든 출국 전 잠시 일손을 돕고 있던 것이어서 그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영국으로 출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시작된 정신없는 학교 일정에 이 모든 일들은 지나간 일 중에 하나로서 완전히 까먹고 영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바쁜 일상을 살고 있었죠.

페이스리스(Faceless)


그렇게 잊혀져있던 이 프로젝트를 다시 꺼내든 계기는 순수미술을 정규 학과로 선택한 이후 처음으로 돌아온 자유 프로젝트에서 였죠. '하고 싶은 주제를 정해서 알아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라.'라는 자유로움이 강조된 브리핑을 듣고 문득 떠올랐던 것이 바로 이 일러스트 프로젝트였습니다. 학교를 위한 프로젝트의 소재가 필요했던 것도 있었지만, 뭔지 모르게 깔끔하지 않은 상태로 끝난 당시의 생각들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프로젝트를 통해서 내린 결론부터 말씀드려보자면, 사람들 얼굴에 가면을 씌어놓는 것으로 그분들의 표정을 부정적으로 느끼고 표현했던 제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프로젝트를 끝마쳤습니다. 결국 가면이란 그분들이 쓴 것이 아니라 제가 그분들에게 씌어놓았다는 결론이었는데, 그 표정을 어색하게 해석하고 거리를 둔 것은 저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웃음이라는 것은 주로 서로의 좋은 인상을 위해서 짓는 것인데 이렇게 좋은 인상을 위해 지은 웃음을 해석할 기회는 결국 상대방에게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어쩌면 그분들이 장애인 여성이라는 사회적 최약자에 속한다는 사실과 그분들을 돕는 시설을 이끄는 이모님과의 관계로 은근한 우월감에 젖어 그분들의 웃음을 마음대로 해석했던 것인지도 모르죠. 만약 그 어색하다고 느꼈던 웃음을 어색하다 해석하지 않고 먼저 다시 한 번 다가갔다면 서로를 불편하게 느꼈던 상황은 다를 수도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반성을 했었습니다. 결국 내가 놓쳐버린 관계라는 것이죠. 이런 반성들을 작품으로 표현해보는 방법으로 가면을 벗기는 일러스트를 그렸던 것이 바로 '페이스리스(Faceless)'라는 캐릭터입니다. 그분들의 표정을 거짓된 가면으로 해석했던 것은 저 자신이였으니 결국 가면은 얼굴이었고, 가면은 얼굴이니 가면을 벗기면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죠.



이런 '페이스리스(Faceless)'라는 반성이 담긴 일러스트와 함께 만들었던 반성하는 애니메이션이 바로 위의 애니메이션 작품입니다. 애니메이션 제목도 가면을 벗겨버린 일러스트의 이름과 같은 페이스리스(Faceless)라고 붙여놓았죠. 1분이 안되는 아주 짧은 영상에 반성을 담아보려고 했는데, 한편으로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를 시도해본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회와 나(Society with me)


이런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에서 탄생한 또 다른 일러스트가 바로 이 일러스트인데 '사회와 나(Society with me)'라는 제목을 가진 일러스트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얻은 가장 핵심적인 생각과 개념을 정리해본 일러스트인데, 결국 사회의 모든 개인은 사회의 또 다른 개인들에게 둘러싸여있다는 최종적인 생각이었죠. 중앙의 점은 사회의 개인, 그리고 그 주위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으로 둘러싸인 듯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개인들은 모두 중앙의 점에 해당하면서도 또 그 주위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구성원으로서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표현해본 것이죠. 결국 우리는 우리 모두에 의해서 구성되어있는 사회에 존재한다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얻은 결론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다른 이를 보는 것이나 다른 이가 나를 보는 것이나 결국은 같은 것이니 좋게 좋게 생각하며 함께 하자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 중심에서의 내 얼굴(My face in the center of the world)


이런 최종적인 생각을 정리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바로 이 '세상 중심에서의 내 얼굴(My face in the center of the world)'이라는 작품입니다. 중앙의 점은 가만히 제 자리를 지키고 주위를 돌고 있는 문양들에는 각각 다른 소리를 넣어놓았는데, 아기의 울음소리와 군중의 웅성거림 그리고 히틀러의 연설을 넣어놓은 기억이 나네요. 각 소리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고 그저 우리는 서로에 의해서 둘러싸여있다는 최종적인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실 지금 보고 있자면, 조금은 지루한 구성에 괜스레 부끄러운 부분도 많은 영상 작품이네요. 


순수미술을 막 시작한 초반기의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설명하고 있자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당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에 대한 기억들이 나면서 은근히 재미가 있는 것 같네요. 이해할 수 없게 추상적이지 않은, 이성적이면서 이해할 수 있는 미술을 하려는 생각과 성향이 이때에도 확실히 존재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성적인 미술을 하려고 했던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 시도들이 기억나는 것이 개인적으로 참 흥미롭습니다. 저만......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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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