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순수미술이라는 이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을까?

사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예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초반까지는 중학교 졸업 시절부터 운영하던 안경테 전문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택배 포장을 하다가 문득 들어버린 '이렇게 쇼핑몰만 하며 살면 내 인생의 끝은 무엇인가?'라는 회의감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패션 디자인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해버립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쇼핑몰을 정리하고 패션 디자인 유학 준비를 위해 다녔던 학원에서 배웠던 그림이 제 인생 처음으로 배운 그림이자, 인생 처음으로 진지하게 진행했던 미술 행위였네요.


그렇게 유학 준비를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졸업 3개월 만에 많이 모자란 영어실력을 위해서 어학연수를 떠납니다. 쇼핑몰의 영향으로 패션 진학을 꿈꾸고 있었으나 사실 어학연수기간에 이미 패션을 공부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죠. 디자인과 패션에 큰 잠재력이나 흥미가 없다는 것을 은근하게 느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결국 패션보다는 순수미술과 드로잉, 일러스트 쪽 학교의 파운데이션 코스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당시 고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약 2년간 준비한 패션 학교를 포기하고 다른 학과를 위한 학교를 간다는 것 자체도 굉장히 큰 선택이었지만, 사실 이때까지도 정규 학과로 순수미술을 선택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그리는 게 재미있어서 일러스트레이션, 드로잉과 같은 학과를 가리라 생각하고 있었죠. 이런 와중에 파운데이션 코스 첫 주에 만난 '순수미술'이라는 존재는 단 3일 만에 내 인생을 순수미술(파인 아트)에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제 인생을 바꿔버린 첫 순수미술 수업 이야기를 다음 문단으로 잠시 미뤄두고, 파운데이션 코스를 지원하기 위해서 진행했던 일러스트 프로젝트를 조금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사실 이 일러스트 프로젝트부터 그림에 개인적인 생각을 담아보려는 듯한 순수미술의 느낌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종교와 무신론'이라는 유난히 심오한 주제부터가 그런 기운을 마구 흘리고 있죠. 이런 혼란들 때문인지 당시 입학 인터뷰를 위해서 들고 갔던 포트폴리오가 참 여러 가지 것들 담고 있었습니다. 패션 프로젝트의 흔적부터 일러스트레이션까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뒤죽박죽한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포트폴리오죠. 그런 난감한 포트폴리오를 들고 진행했던 입학 인터뷰에서 만났던 교수가 '일러스트 능력도 좋고 재미있으나 순수미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확실히 대답을 하지 못 했던 것이 이미 이 시절부터 은근히 순수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지나 제 과거 생각들이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디자인부터 순수미술까지 다양한 과들을 경험해볼 수 있는 파운데이션 코스에 붙여준 그 교수에게 다시 한 번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


버로우 마켓의 상인들의 자리를 표시하는 듯이 땅바닥에 배치되어있는 자리표


어쨌든 저를 파인아트의 길로 들게 만든 첫 프로젝트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런던 동부 쪽에 학생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풀어놓고는 알아서 작품을 만들고 제출하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아주 혼란스러운 과제였죠. 그날은 정말 그저 부근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놀고먹고 떠드는 수업 같지 않은 수업이었습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니 주위를 기웃거리던 중 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들은 여기저기 잠겨있는 자물쇠들과 영국의 유명 관광지 버로우 마켓에서 상인들의 자리를 표시하는 듯한 자리표들이었는데, 소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좋은 물건들 이였죠.


이렇게 수업 같지 않은 수업과 함께 시작된 이 2주의 파인아트 수업은 평소 늘 쓸데없다고 평가받던 제 특유 잡생각들의 재발견이었습니다. '쓸데없이 많이 생각하고 피곤하게 산다.'는 평가를 받던 저의 많고 많은 잡생각들이 이 파인아트 수업 중에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아니었던 것이죠. 외국인으로 가득 찬 교실에서 처음으로 짧디 짧았던 영어와 함께 제 잡생각들을 풀어놓았던 프레젠테이션은 참 신기하게도 박수갈채를 불러왔었습니다. 그 짜릿함의 기억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기억 중에 하나이죠.


  


그렇게 일주일에 3번가도 되는 학교를 작품을 만들기 위해 2주간 매일 출석하며 작품 제작을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파운데이션 과정 중에서도 9가지 미술 분야들을 체험하는 첫 학기의 수업이어서 그리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당시는 그저 만들고 싶어서 매일 같이 학교에서 제공한 작업실에 있었죠. 물론 첫 주만에 찾아온 순수미술에 대한 이런 아주 강력한 확신은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일러스트와 패션 디자인 분야의 수업 들을 아주 흥미 없는 수업으로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꾸역꾸역 과제를 하며 학과를 고르는 2학기에 순수미술을 고르고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굉장히 들떠있었죠.


사실 다시 한 번 과거의 기억들을 조금 꾸역꾸역 떠올려보자면, 이 수업을 듣기 전부터 순수미술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은 기억도 납니다. 최소한의 룰 안에서 존재하는 듯한 일러스트나 디자인과 같은 분야와는 다르게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유로워 보이는 순수미술의 모습은 개인적으로 참 흥미로웠죠. 하지만 그런 순수미술의 자유로움과 흥미로움 뒤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과 불안한 미래를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순수미술에 그런 많은 위험요소들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으니 그나마 비슷하게 자유로우면서 어느 정도의 미래가 보장된 일러스트과를 선택한 것 같기도 하죠. 하지만 파운데이션 코스에서 만난 첫 수업은 이런 위험 요소들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의 매력이었나 봅니다.



(이 작품의 자세한 설명은 다음 포스팅으로 미뤄두고) 이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은 유학 생활로 인해 많이 부족한 저장 공간으로 인한 보관 문제로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영상도 잘 남아있네요. 안타깝게도 더 이상 존재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작품을 보고 있자면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진짜 이렇게까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네요. 이 당시 이렇게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너무나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 미술을 계속하려면 정말 더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순수미술을 시작한 계기도 풀어보았으니 이제 다음 글부터 본격적으로 제 개인적인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보면 될 것 같네요. 다음 글에서 소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았던 이 처녀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반응형

댓글

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