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전문가

전문성 혹은 전문가라는 단어는 오랜시간 동안 저를 괴롭혀온 단어입니다. 전문가로서의 미술인이란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다보면 다양한 생각들이 충돌을 일으키며 그 해결점을 찾기가 힘들어지는데요. 전문성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상당히 복잡한 주제이기도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적인 경향이 있는 주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평소 미학적인 주제들에는 귀를 열고 들어주시는 경향이 많았던 미술 외적인 직업을 가진 지인들도 이 주제에서 만큼은 활발한 대화 참여가 이루어지는 느낌이 강했으니 말이죠. 가끔은 제가 공부하고 꺼내놓은 주제임에도 오히려 귀를 열고 들어봐야할 의견들이 많았을만큼 전문성 혹은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것은 상당히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 친구의 그림(왼쪽)과 영국의 유명 작가 데이비드 쉬리글리의 그림(오른쪽)


가장 최근 전문성에 대해 재미나게 생각해볼 수 있었던 일화는 위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 데이비드 쉬리글리와 함께 얽혀 있는데요. 이제 막 그림을 배우는 친구의 그림이 데이비드 쉬리글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에 데이비드 쉬리글리의 그림을 소개시켜주며 시작되었습니다. 데이비드 쉬리글리를 저에게 소개 받은 친구는 이후 본인의 친구에게 데이비드 쉬리글리와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며 아래와 같은 일화를 만들어왔죠.


A : 이거봐. 이 작가 그림 내 그림이랑 진짜 비슷하지?

B : 오, 그러네. 그래도 이 작가꺼는 작품이고 너껀 낙서지.

A : 왜?

B : 팔로워 수가 다르잖아.

A & B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시 한 SNS를 이용해 데이비드 쉬리글리의 작품을 보여줬다고 하는데요. 장난스러운 대화이지만 가벼운 대화이기에 평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더욱 자연스럽게 묻어난 대화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데이비드 쉬리글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인데요. 상당히 장난스러운 그림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림이 담고 있는 유머가 상당히 어두우면서도 재미있는,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흥미로운 작가입니다. 다만 그의 장난스러우면서도 유치원생이 그린 듯한 스타일의 그림은 관객들에게 그에 대한 의문을 들게 만드는 부분이 많죠.


데이비드 쉬리글리의 작품을 바라보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친구의 일화와 함께 떠올랐던 개인적인 의문은 미술의 전문성이 가지는 모호함이었는데요. 팔로워 수가 다르다는 말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유발하는 이유는 어쩌면 미술의 전문성이 가지는 모호함으로 인한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의 배경이 작가의 전문성을 만들어낸다는 부정적 인식이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로서 담겨있을 수 있는 것이죠. 특별한 기준 없이 그저 작가의 배경이 미술의 전문성의 전부일지 모른다는 희화화가 존재하지 않을까하는 끝나지 않은 의문이 담긴 생각입니다.


데이비드 쉬리글리의 작품 '나는 생각이 싫다.(I hate thinking)'


사실 미술의 전문성이라는 것은 정말 모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소인데요. 최근에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전문성이라는 단어가 과연 적합한 단어인가?'라는 의문마저 들기도 했죠. 이처럼 현재까지도 저를 괴롭히고 있는 미술의 전문성에 대해 가장 처음 생각하게 됐던 계기는 바로 에세이와 논문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던 시기였습니다. 영국 유학시절 학기 중 2편의 에세이는 필수적인 평가 요소로 작성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마지막 졸업 학년에는 오직 1편의 졸업 논문을 위해 1년을 공부하며 매달려야 했었죠. 이런 시기에 문득 대학 진학 전에 가졌던 에세이와 논문의 이미지와는 다른 실제 에세이와 논문의 모습은 미술의 전문성이라는 부분에 대한 여러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진학 전 저에게 에세이는 누구나 적을 수 있는 미술에 대한 조금은 가벼운 글 그리고 논문은 미술인 혹은 전문가가 작성하는 전문성이 존재하는 글이라는 이미지 였는데요. 대학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에세이를 쓰고 졸업학년에 들어서 논문을 진행하다 문득 들었던 생각은 에세이와 논문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졸업을 위해 작성했던 졸업논문은 에세이와 똑같은 책 인용 방식 등 그 형식이 완전히 일치했는데요. 에세이와 논문의 차이점은 정말 간단하게 글의 길이에 있었습니다. 논문은 그저 에세이에 비해 제출해야하는 분량이 5배 이상이기에 하나의 주제를 더 많은 예시와 논점들과 함께 깊게 파고들 수 밖에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었죠.


물론 하나의 주제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기 위해 더욱 많은 지식과 이해도는 필수입니다. 하지만 많은 지식과 높은 이해를 가진 누구나 하나의 주제를 깊게 파고든다면 또 누구든 논문을 쓰는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미술의 전문성이라는 부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었죠. 물론 논문이 학문적인 글로서 대학에서 보관하는 글이라고 해석한다면 미술 분야의 학교를 다니지 않은 이들의 글을 논문이라 부를 수 없게 되겠지만 이런 환경적인 요인을 제외한다면 결국 누구든 논문에 준하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논문이란 에세이와 다르게 전문가로의 전문용어가 사용된다는 과거의 편견을 깨트린 순간이기도 했죠. 제가 가지고 있던 이와 같은 편견은 오직 저만의 것이 아니라 미술을 본으로 삼지 않는 많은 이들이 미술의 비평문과 미술 논문 등에 가지고 있는 대중의 편견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편견 속에서 에세이와 논문의 차이가 결국 글의 길이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다양한 생각을 들게 만슬 수 밖에 없는 흥미로운 사실이었죠.


또 비슷하게 대치하고 있는 글의 종류로는 감상문과 비평문이라는 두 형태의 글도 있는데요. 두 글의 성격이 가지는 대비가 에세이와 논문이 가지는 대비와 거의 일치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상문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또 비평문은 미술 전문가에의해 탄생한 글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죠. 그런데 감상문과 비평문은 왠지 에세이와 논문 때와는 다르게 그저 글의 길이 차이로 그 둘을 나눈다는 것이 그리 시원한 해결책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데요. 어쩌면 감상문과 비평문은 실제로 일반인이 쓴 글 그리고 전문가가 쓴 글의 차이로 보이는 듯한 모습마저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에세이와 논문과는 다르게 같은 분량의 글임에도 각각 그 특징에 따라 감상문과 비평문으로 나눠볼 수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 이 두 형태의 글은 에세이와 논문을 바라보던 시선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문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예인 것 같은데요. 어쩌면 일반인과 전문가의 차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좋은 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제가 생각하는 이 실마리를 말씀드려보자면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한 설득력이 그 실마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한 설득력이라는 표현이 전문용어가 가득한 글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문용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글은 오히려 전문적인 지식을 그저 뽐낼뿐 설득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생각하는데요. 알아듣기 쉬운 설명과 적제적소에 등장하는 알맞은 전문용어가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생각이죠. 이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에세이와 논문의 차이를 이야기하던 당시와 비슷한 바탕을 가진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글의 길이차이로 구별을 했던 에세이와 논문은 결국 글을 길게 적는 것으로 설명과 예를 늘리며 설득력을 높이는 것이니 말이죠. 


하지만 설득력이라는 눈으로 확실하게 볼 수 없는 요소를 전문가의 판단 기준으로 둔다는 이 말은 어쩌면 조금은 무책임하면서도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된 글들은 모두 그림의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던 1800년대를 기점으로 생겨난 새로운 글의 형태들이었는데요. 약 2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진 이 글들은 사실 한국에서는 1950년대에 들어와서야 시작 되었습니다. 200년이 조금 넘은 한창 형성되고 있는 글의 형태가 한국어로 시작된지는 겨우 50년이 조금 넘은 시간 밖에 지나지 못한 것이죠. 하지만 이 50년의 시간동안도 사실 해외에서 벌어지는 미술에 대한 해외의 글에서 지식을 얻어 한국어로 가져오는 형태가 주를 이뤘다고 할 수 있는데요. 국내의 큰 미술적 흐름이나 변화가 존재하지 못하는 환경으로 인해 독자적인 내용의 글 보다는 해외의 미술적 흐름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현지의 글들을 답습하는 것에 그치지 못하는 모습이 주를 이룰 수 밖에 없었죠. 어쩌면 이와 같은 환경으로 인해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이해하기 힘든 글쓰기를 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해외 미술의 정리된 과거 움직임을 파악해놓고 정리해놓은 비평들을 보며 지식을 그저 늘리는 것 외에는 한계가 있었던 국내 비평의 방식은 어쩌면 지식을 한층 발전시키기 위한 모습 보다는 지식을 축적하고 뽐내기 위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시선이죠. 혹은 더 많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지식의 우열을 가려야하는 환경에서 전문용어는 새롭게 나타날 경쟁자들의 진입장벽을 높이면서 같은 지식을 더 우월하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흐름과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 국내의 환경 자체가 이해력을 높이며 개인의 지식을 한층 발전시키기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슬픈 환경 속에 있었던 것이죠.


미술은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속에서 존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문학이란 사회의 구성원 모두와 함께 발전해야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인문학은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것을 창조하고 생각하고 정의해가며 만들어가는 학문이기에 그런 것이죠. 존재하는 것을 탐구하고 찾아내어 정의하는 자연과학의 분야와는 확실한 대비를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생각이나 사상 혹은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적인 부분들을 정의하는 인문학이라는 분야에서 사회 속의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가의 글, 말, 행동이 과연 옳바른 전문성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생겨날 수 밖에 없죠. 사회적인 공감이나 이해를 받지 못하는 전문가가 과연 올바른 방향의 인문학적 전문가인가하는 의문이 가장 큽니다.


또 다른 문제는 사회적인 공감과 이해를 가진 전문성을 새로운 해결점으로 제시한 이 시점에서 현재의 미술은 사회적인 공감이나 이해를 이끌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회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요. 낮은 관심은 이해도를 낮추고 낮은 관심과 이해도는 결국 전체적인 공감을 만들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야기하는 것만 같죠. 역사조차 짧은 이 시점에서는 그 혼란이 더더욱 빠른 속도로 거대해지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듯 합니다. 그야말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하는이와 보는이 모두가 혼란에 빠져있는 상황인 것이죠. 그런데 외국어권에서는 약 200년 그리고 한국어권에서는 약 50년의 역사를 가지지 않은 그 체계의 형성 시기에 있는 이 새로운 현대미술의 전문성이라는 요소는 어쩌면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00년의 시간이 지난 해외도 혼란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50년의 시간이 지난 우리 또한 혼란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죠. 이러한 시기에서는 어쩌면 짧은 형성 기간으로 인한 혼란을 인정하고 사회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전문성의 기준들을 제시하며 사회적 공감과 관심이 들어간 시대적인 전문성의 기준을 만들어내야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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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