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린 꽃그림인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의 '흰 독말풀(Jimson Weed)'


꽃은 오래전부터 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져왔던 대표적인 사물 중 하나입니다.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도 하는 자연 그대로의 사물이기에 많은 화가들의 눈에 들며 그림으로 그려져 왔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많은 화가들에게 그려져 온 꽃 그림들은 그림을 그려낸 화가의 인종, 출신 등 화가의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끔은 극단적으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을 그리는 것으로 아픔이라는 대조적인 감정을 표현했다는 해석을 받으며 여성이 그린 꽃은 사회적인 차별 속 여성의 아픔을, 흑인이 그린 꽃은 흑인이기에 받아야 했던 아픔으로 해석되는 등 작가의 배경에 따른 각각의 아픔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백인 남성이 그려낸 꽃 그림은 출신 배경에 따른 편향된 해석 없이 순수한 예술 행위로 그려진 꽃그림으로 인식되는 듯한 흥미로운 모습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차별의 아픔 등을 상징하기도 하는 꽃을 그린다는 행위에서조차 은근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물론 위의 그림처럼 여성 작가가 그린 그림이 꼭 여성의 아픔을 상징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꽃그림 '흰독말풀'을 그린 '조지아 오키프'라는 미국의 여성작가는 여성 작가로서 추상환상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을 창조해내기도 했죠. 하지만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작가들 중 여성 작가들을 떠올리라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작가들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날린 여성 작가는 남성 작가에 비해 굉장히 적은 수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느끼며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죠.

이와 같은 사실과 함께 '왜 역사 속에는 여성 작가들이 존재하지 못 했을까?'라는 질문은 많은 미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한 화두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질문의 대답으로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선택하고 있는 편이죠. 사회적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제 대답에 대한 이유를 설명드려보자면 '왜 역사 속에서 유명한 여성 작가의 수는 적은 것일까?'라는 질문을 조금 확장시켜보아야 하는데요. 이를 확장시켜보자면 질문은 '왜 역사 속에는 백인 남성의 작가가 주를 이루고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변화합니다. 사실 미술 역사를 훑어보았을 때 적은 수를 보여주는 것은 여성 작가뿐만이 아닌데요. 백인 남성 이외의 다른 인종의 남성, 여성 작가의 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죠.

이는 현재 서양미술이라 불리는 서양에서 발전한 미술의 형태가 전 세계에 퍼져있는 것으로 인한 현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서양 미술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최근 100년의 시기만 살펴보아도 백인 남성 작가의 수는 백인 여성 작가를 포함한 다른 인종의 남성 작가들을 합친 수 보다 그 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와 남성우월주의에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면 이런 현상에는 어떠한 사회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죠.

 

중국 현대미술의 4대 천황 : 왼쪽부터 순서대로 장샤오 강, 위에 민준, 왕 광이, 팡리 준


개인적으로는 중국 작가들의 사례를 통해 이와 같은 문제점을 파악해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핫한 중국 작가로 떠오른 이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대립되는 사상들의 혼란 속에 살고 있는 중국인의 모습'과 관련된 해석을 받고 있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국 현대미술의 4대 천왕이라 불리는 장샤오강, 위에 민준, 왕광이, 팡리준 이 넷 모두가 이와 같은 사상적인 충돌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장샤오 강'은 과거 사진과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합쳐지며 겪었던 중국 사회의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표현했다고 해석됩니다. '위에 민준'은 지나치게 크게 웃고 있는 이들을 그리며 혼란스러운 사회를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해학과 풍자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죠. 또 '왕 광이'는 대놓고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포스터 느낌의 그림 위에 자본주의의 로고들을 그려놓습니다. '팡리 준'은 허무한 표정을 지은 대머리의 사람들을 그리며 사상적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허무함을 표현했다고 해석되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충돌하고 있는 중국 사회의 모습은 흥미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혹은 꽃 그림이 작가의 출신과 함께 해석되는 경향이 있는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가 이 중국 작가들의 모습과 무슨 연관성이 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요. 간단하게는 왜 오직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들만이 중국의 대표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꽃 그림이 작가의 출신과 함께 해석되는 편향된 경향에 대한 문제점과 일맥상통하는 구조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수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중국 작가들 속에서 오직 중국이 겪은 사상적 혼란을 표현한 작가만이 떠오른 것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죠. 어쩌면 주류 미술계가 다른 인종과 여성 작가들의 꽃 그림보다 백인 남성의 꽃 그림들을 조금 더 순수한 예술을 위한 그림으로 바라보았던 편향된 시각은 오직 사상적 혼란을 표현하고 있는 중국의 작가들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편향된 시각과 비슷한 흐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중지 손가락(Middle Finger)'


중국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 특징은 확실히 미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아주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특징인데요. 중국 사회를 대놓고 비판하며 북경의 천안문에 중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사진을 찍는 작업을 하기도 했던 아이 웨이웨이는 실제로 중국 내부에서 탄압을 받으며 해외에서 진행하는 전시를 막기 위해 중국에서 출국 금지를 당하고 작업실 근처에 늘 공안이 상주하는 등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화들은 해외에서 오히려 더 이슈가 되며 그의 인기는 더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죠.

이처럼 떠오르는 작가라는 것은 어쩌면 주류 미술계가 원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그들이 원하는 인물상에 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여성 작가의 수를 줄였고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중국 작가의 카테고리를 작게 만드는 큰 영향력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작업하는 작가 중 시대가 원하는 이들이 떠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주류 미술계를 맡고 있는 서양권에서 원하는 동양 느낌의 작품을 하고 있는 동양인 작가를 원하는 경향과 함께 중국의 혼란스러운 사상적 충돌을 표현한 작품 위주로 작가가 떠오르는 모습은 조금은 무엇인가에 휘둘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조금 더 슬픈 사실은 현재 한국은 그와 같은 매력을 가진 한국만의 이미지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죠.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의 '흰 독말풀(Jimson Weed)'


간단하게는 한국만의 독자적인 미술의 모습을 가졌으 좋겠다는 생각을 이 글과 함께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본인만에 화풍을 만들어내며 시대적인 경향을 무너트리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몇몇 기억나는 여성 작가들처럼 말이죠. 차별을 인식하고 변화하려는 노력에는 차별을 만들어내는 경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에서 해외의 관심을 받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두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벌어지는 국내만의 독특한 흐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죠. 휘둘림이 아닌 독립적인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기차에 올라 똑같은 루트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기차와 경로를 만들어 색다른 매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댓글(0)

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