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인 그림을 역동적인 그림으로 보다.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의 그림 '휘슬자켓(WhistleJacket)'


이 그림은 '휘슬자켓'이라는 제목을 가진 '조지 스텁스'의 그림입니다. 런던의 중심지 트라팔가 스퀘어에 위치한 '내셔널 갤러리'에 보관, 전시되어 있는 작품인데요. 말의 역동적인 동작을 예리하게 캐치하여 표현한 작품이면서 높이 3미터, 길이 2.5미터에 달하는 그림의 거대한 크기로 인해 내셔널 갤러리를 관광 목적으로 다녀간 관객들에게도 강렬한 인상과 함께 많이들 기억하고 있는 작품이죠 실제 런던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내셔널 갤러리의 말그림'이라 불리며 내셔널 갤러리를 비공식적으로 대표하는 그림이기도 하다는 후문입니다.

한 번은 우연한 기회로 BBC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그림이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본 적이 있는데요. 다큐멘터리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시선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당시 다큐멘터리에서는 현대인이 일상에 놓여있는 이미지들에 노출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인식하는 훈련을 받았고 그로 인해 사진과 화장실, 버스 정류장 등을 표시하는 이미지와 기호들을 오류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심지어는 우리가 역동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이 '휘슬자켓'이라는 말그림을 역동적으로 느끼는 것마저 자연스러운 현대의 환경적인 시각 훈련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증거로 제시한 것은 바로 우리에게는 너무나 역동적으로 보이는 휘슬자켓을 말이 그려진 그림으로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정글 원주민의 사례였는데요. 평생 문명권 안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을 본 적이 없는 정글의 원주민은 이 휘슬자켓이라는 그림을 말을 그린 그림으로 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의 사례였습니다. 평생 그림을 볼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지 못한 것이 그 이유라는 설명이었죠.

 

러시아의 역원근법 이미지들


그렇게 하나의 신기한 다큐멘터리로 기억되며 잊혀졌을 휘슬자켓이라는 그림과 다큐멘터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던 계기는 바로 러시아의 역원근법에 대한 부분을 접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러시아의 원근법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근법의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역'원근법이라고 불리는데요. 위의 두 그림에서 표현된 네모 형태의 사물들을 보면 왜 이 이미지들에 사용된 원근법이 역원근법이라 불리게 되었는지를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첫번째 그림은 성모의 탄생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이 이미지에서 잔 두 개가 올려져있는 테이블은 마치 앞이 좁고 뒤가 넓은 가구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있는데요. 하지만 그저 직각의 네 각을 가진 일반적인 네모 형태의 평범한 테이블을 그려놓은 그림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표현한 두 번째 그림의 예수가 밟고 있는 네모난 사물 또한 앞이 좁고 뒤가 넓은 형태로 표현되어있지만 이 사물도 일반적인 네모 형태를 가진 사물을 표현한 것이죠. 이처럼 러시아의 원근법은 가까운 면을 넓게 그리고 먼 곳에 해당하는 면을 좁게 그리는 일반적인 원근법과 반대로 그려지는 원근법이기에 역원근법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당시 이 그림을 보고 살았던 이들에게는 이것이 그들의 그림 속 거리감을 표현해주는 원근법이었죠.

일반적인 원근법을 보고자란 우리는 위와 같은 역원근법적인 표현들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인데요. 이런 대목에서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며 역원근법이라 불리는 이 러시아의 원근법을 보고 자랐던 그들에게는 역원근법의 그림들이 현실적인 묘사로 보였을까?'라는 물음에 자신있는 대답을 내놓기가 힘든 느낌입니다. 휘슬자켓이라는 그림을 말로써 보지 못했다는 정글 원주민의 예를 들은 이후 이다보니 이와 같은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기가 힘든 것 같은데요. 실제적인 사례로 인해 자연스럽게 눈에 익은 우리의 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면서도 눈에 익어버린 이미지들에 대한 믿음과 익숙함을 부정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이 원근법들에 대해 파고들어가보자면 우리가 익히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원근법은 시각을 받아들이는 눈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상태의 이미지를 받아들인 것이고 러시아의 원근법을 따르는 역원근법은 눈이 한 곳에 고정되지 않은 시점에서 만들어지기에 위와 같은 (원근법에 눈이 길들어진 우리에게) 왜곡 되어보이는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것인데요. 다시 말해 시각이 고정되지 않은 역원근법에서는 책상을 왼쪽에서 보았을 때의 책상 왼쪽면과 오른쪽에서 보았을때의 오른쪽 면을 모두 그려넣어야 했기에 책상의 왼쪽, 오른쪽 선이 똑같이 그려지며 앞면이 좁고 뒷면이 넓어지는 결과물이 나와버린 것이죠. 그에반해 시각이 고정되어있는 일반적인 원근법은 한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시점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원근법을 가진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현재 이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는 저 조차도 이미지가 '왜곡되어있다.' 혹은 '일반적이지 못하다.'라고 느끼고 있지만 정글 원주민의 사례를 접해본 현재로서는 과연 이러한 시선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원근법의 이미지에 의한 것이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또 어쩌면 눈과 같은 역할을 하는 렌즈가 고정된체 시각을 받아들여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진기라는 기계가 만들어낸 사진이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는 현대 사회의 환경으로 인해 더더욱 러시아의 원근법을 '역'원근법이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기서 사진기의 사진이라는 이미지가 보여주는 원근법이야말로 우리의 시각과 일치하는 원근법이기에 진짜 일반적인 원근법이지 않겠냐하는 반론을 내놓아 볼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만약 역원근법을 보고자란 사회에서 카메라가 발명되었다면 한 곳에 고정되어 찍힌 일반적인 카메라의 사진은 그들에게 그저 눈으로 보기에만 똑같은 그림일 뿐 원근법을 따르지 못한 왜곡된 이미지라는 시각을 가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그들의 원근법을 따르기 위한 렌즈가 두 개가 달려 사진을 찍은 후 두 사진을 조합해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그들만의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수도 있겠죠.

어려서부터 이 사회의 이미지들에 노출되어 길러진 제 눈을 통해 이러한 훈련 과정이 없었던 순수한 눈의 시점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원근법을 따르며 정사각형의 테이블을 그리는 그림에서도 왜 이를 정사각형으로 그리지 않고 가까운 곳을 넓게 먼 곳을 좁게 그리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쓸데없는 듯 하지만 오묘하게 확답을 내리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원근법이 일반적인 눈이 바라보는 시각과 가장 흡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죠. 원근법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진에 눈이 길들여져 그런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너무나 원근법을 통해 만들어진 사진의 세상과 일치하는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듭니다. 하지만 또 이런 원근법에 대한 인식과 같은 맥락에서 현실과 똑같아 보이는 역동적인 말의 모습을 그려낸 '휘슬자켓'이라는 그림이 정글 원주민들에게는 말그림으로조차 인식되지 못했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죠. 

이런 부분에서 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원근법이라는 것은 사물을 표현하는 표현법이 아닌 멀리 있는 사물을 작게 그리고 가까이 있는 사물을 크게 그리는 것으로 그림 속에 거리감을 조성하며 공간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기법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어쩌면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말을 정글의 원주민들이 말이라 인식하지 못한 것은 배경에 말과 어울리는 마굿간 혹은 자연의 이미지가 없어서 그런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경의 표현 없이 그저 간단하게 그려진 화장실 표시를 보고 그 이미지의 실체와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배경의 표현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림을 읽어내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받아낸 것일수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 끝에도 정말 저 휘슬자켓이라는 누가봐도 말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가진 이 그림을 꼭 배경들과 함께 보아야만 말이라 인식할 수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은 계속 됩니다.

러시아의 역원급법 이미지들

 

'훈련에 의한 것이다.' 혹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러시아의 역원근법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아보자면 역원근법을 사용하던 당시 이미지를 바라보던 또 다른 시각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바로 오직 2차원의 표면 위에 그려낸 그림에서만 이와 같은 역원근법이 사용되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존재합니다. 쉽게 말해 그림과 같은 분야에서만 이와 같은 왜곡이 돋보이는 역원근법이 사용됐고 그 외 조각 등의 입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예술 분야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원근법 방식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러시아에어 역원근법을 사용하던 당시 만들어진 위의 두 이미지를 비교하면 그 사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미지는 예수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두 번째 이미지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은채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표현한 이미지인데요. 예수가 의자에 앉아있는 첫 번째 이미지는 역원근법과 함께 의자에 등받이를 곡선으로 표시하며 평면 위에 그려진 그림 속에 입체적인 공간감을 표현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에반해 두 번째 이미지는 형상을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부조라는 조형 기법을 사용한 입체적인 형태의 면을 가지는 예술 기법이기에 일반적인 원근법에따라 의자의 등받이가 직선으로 표현이 되어있죠. 이처럼 역원근법이라는 것은 3차원의 입체적인 공간을 2차원의 평면적인 그림에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인데요. 이것은 마치 우리가 쓰고 있는 글의 문법 혹은 화장실 표시처럼 하나의 사회적인 약속이었던 것이죠. 어쩌면 당시의 사람들은 첫 번째 이미지의 역원근법과 함께 표현된 곡선을 이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2D 평면 위의 그림을 3D의 입체적인 공간 표현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는 것인데요. 혹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평면 위에 그려진 곡선의 표현을 보는 것으로 2D의 평면 위에 그려진 곡선들을 공간감이 있는 직선으로 보았던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습니다. 현대의 이미지에 노출된 자연스러운 훈련이 녹아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런 부분을 미지에 빠트리는 걸림돌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죠.

 

제프 월(Jeff Wall)의 사진 작품 '우유(Milk)'

 

길을 걸어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꺼내도,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늘 이미지라는 것과 함께하는 현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 200년 정도만 내려가보아도 사진이라는 것은 개발 초기 혹은 존재조차하지 않던 시절이었죠. 그림은 오랜 역사와 함께 화가들에 의해 계속 그려져 왔지만 사진 기술이 없고 인쇄 기술이 발달되지 못 하다보니 그림은 오직 원본 밖에 존재하지를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길거리에 광고물도 표지판도 드물었고 술집이나 잡화점의 간판들이 그나마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역할을 맡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중 당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시각 이미지들은 역시 교회, 성당과 같은 종교 건물에서 볼 수 있었던 종교 예술들이었겠죠. 원하는 그림을 보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게 검색을 하는 지금과는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기회의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는 가히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상반되는 상황은 현재보다 그 이미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훈련을 시키기에 더 좋은 환경이었을 수도 있죠. 혹은 많은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을 통해 그림 속 사물을 인지하는 것에 예민한 시각을 가지게 된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의 사람들은 적당히 그려도 너무나 잘 그린 것처럼 인식하는 예민함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유치원생의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그려놓은 강아지 그림을 보여주면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똑같이 잘 그리냐는 말과 함께 감탄을 들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이미지에 노출이 적은 당시의 사람들은 현대 시대 유아들 정도의 시각적인 예민함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우월함에 대한 차이가 아닌 자연스러운 생활상으로 인해 빗어지는 발달하는 감각의 차이에 의해 벌어진 일이겠죠. 그리고 정글의 원주민들은 당시 시대의 사람들과 비슷한 시각적인 예민함을 가졌기에 우리에게는 너무나 역동적인 말그림으로 보이는 휘슬자켓이라는 그림을 말로써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이 글은 저도 개인적으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한 글이어서 그럴까요. 글 자체가 호기심을 잔뜩 담고 있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의 의견을 묻고 싶어하는 저의 갈증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 같기도 한데요. 자연스러운 교육에 의해 그림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이 부분은 어쩌면 예술품에 우월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또한 아직 풀리지 못한 느낌이 가득한 생각이지만 말이죠. 하나의 의문을 풀기 위해 다양한 생각들을 글에 풀어보았지만 역시 미술과 예술이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의문과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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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가 : 이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