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미술가 이동준 (3) 예술가, 관객, 작품 (드레)


* 아래는 라디오의 내용을 문어체로 한 번 더 편집한 글 입니다. *


안녕하세요, 새라 미술 이유식을 진행하고 있는 개념미술가 이동준입니다. 오늘은 이어지고 있는 ‘개념미술가 이동준’ 시리즈의 세 번째 편을 ‘예술가, 관객, 작품’이라는 제목과 함께 진행해 볼까 하는데요. 돌아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죠...? 이번 편을 통해 말씀드리고 싶은 주제가 좀 복잡한 면이 많아 준비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은데요. 작업실 이사 등의 개인적인 일들도 겹치면서 한 회를 위한 다양한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돌아왔으니 조금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지난 회차들이 제가 미술을 시작한 계기와 미술 속에서의 저 자신이 어떠한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말씀드려본 것이었다면, 이 ‘예술가, 관객, 작품’이라는 제목과 함께 풀어보는 오늘의 회차는 제가 가진 미술에 대한 가치관을 본격적으로 풀어 놓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일단 이 회차의 제목부터가 제 개인적인 미술 가치관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술을 크게 예술가, 관객, 작품, 이렇게 세 가지 요소로 나눠서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기에 전시라는 요소를 넣어 4가지 요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아직은 이 세 가지 요소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히고 있기도 하죠.

이 세 가지 요소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예술가라는 미술의 요소는 결국 관객이라는 요소에 포함된다는 것인데요. 결국 예술가도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것을 제외한다면 다른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죠. 혹은 예술가라는 존재는 자신이 만든 작품마저도 작품이 완성되어 자신의 손을 떠나는 순간 더 이상 수정할 생각이 없다면 자신의 작품마저도 결국 그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작품에게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란 늘 따라다니는 배경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그 둘은 조금은 독특한 애착 관계를 가진 관객과 작품의 관계일 뿐 일반적인 작품과 관객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예술가와 관객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이 시각에는 반대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기도 한데요. 사실 저는 우리가 모두 결국은 작품이라는 것을 만드는 혹은 만들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의 바탕에는 우리가 생에 가장 먼저 만드는 미술 작품이란 어쩌면 우리가 부모님을 위해 처음으로 그려드렸던 그림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존재하는데요. 혹은 부모님이 버리지 못하는 나의 어릴 적 옷가지들도 우리가 만든 미술 작품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에 큰 쓸모는 없지만, 추억과 함께 버릴 수 없는 많은 물건은 사실 갤러리에 내놓여진 미술 작품과 크게 다른 부분이 없기도 하죠.


예술가와 관객, 작품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이렇게 실용적으로는 필요 없는 것을 만들고, 바라보고, 느끼며 추억하는 것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하나의 작품이 사회 전체적으로 대중이 관객으로서 관람하며 이 관람을 통해 사회 전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추억할 수 있는 현상은 그저 특정 개인만이 느끼고 추억할 수 있는 옷가지, 어릴 적에 그린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아주 간단하게는 명성황후의 옥비녀와 어머님이 사용하시던 옥비녀는 같은 모습을 가진 옥비녀라 해도 완전히 다른 사회적인 시선과 생각들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는 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라는 개념이 담긴 작품이고 하나는 나의 개인적인 기억 속의 어머니라는 개념이 담긴 작품인 것이죠.

사회적인 가치로서는 당연히 명성황후의 옥비녀가 훨씬 큰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어쩌면 개인적인 가치로서는 어머니의 옥비녀가 명성황후의 옥비녀를 앞지를 수 있다는 생각인데요. 금전적인 가치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여도 기억을 나누고 감동을 나누는 가치로서는 어머니의 옥비녀를 바라보는 개인의 관람이 가지는 가치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음… 여기까지가 제 개인적인 미술의 가치관을 간편하게 표현하기 위한 예들이었다면 이제는 조금 복잡한 현대 속의 미술과 함께 이 부분을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요. 현대 속의 미술은 사실 ‘누가 그렸느냐, 만들었느냐.’ 이전에 ‘왜 그렸느냐, 왜 만들었냐’를 물어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또 과거의 미술에 대해서는 ‘왜 존재했느냐.’를 묻는 의문에 가득 찬 시대이기도 하죠.

미술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관객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사회의 관객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위에서 아래로 정해져 내려온 미술 취향을 그저 따라가는 이들이 아닌 것이죠. 혹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고 표현하기에는 관객들 자체가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현대라는 사회의 관객들은 그저 본인만의 취향을 생각하고 존중하기 시작했고 다른 형태의 취향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궁금해하며 본인과는 다른 취향이 가진 그 다름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런 특징을 가진 관객 중 일부는 예술가가 되어 이 환경과 생각을 기반으로 한 본인의 취향을 자유롭게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여기까지 듣고 있자면 이 현대라는 사회는 과거 전통적인 사회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부조리와 불합리한 부분이 해소된 이상적인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세상 어떤 곳이든 단점은 늘 존재하는 법이죠. 이 이상적인 모습을 가진 듯 보이는 현대 사회에도 단점이 존재하는데요. 제가 하도 자주 꺼내놓기에 제 라디오를 들어주시는 분들이라면 조금은 쉽게 혹은 질리는 느낌과 함께 떠올리실 수 있는 바로 그 단어 ‘혼란’입니다. 본인과 다른 이의 취향에 대한 존중은 다양성을 만들어냈고 이 다양성은 자유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세상을 상당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기도 한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다양성 속의 혼란은 사회적으로는 남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살아가며 나타나는 개인의 취향에 대한 자부심 혹은 남의 취향에 대한 무시가 만들어낸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치 교과서 속의 사회와 실제 현실의 사회가 다르듯,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제가 ‘예술가, 관객, 작품’이라는 요소를 생각하며 가장 많이 흥미를 느끼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혼란’에 대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라디오 회차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언급했을 만큼 많은 분이 이미 쉽게 느끼고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은 이 ‘혼란’을 풀어보기 위해 ‘전문성’이라는 요소를 이용해볼까 합니다.

‘전문성’이라는 것은 어느 분야에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미술에서는 참 모호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데요. 자연과학과 같은 특정한 성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죠. 특히나 예술가와 같은 미술을 만드는 전문 미술인도 관객에 포함시키는 제 개인적인 가치관 안에서는 더욱 모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전문성에 관래 이야기하는 글의 편의를 위해 관객을 둘로 나눠보자면 전문 관객과 일반 관객으로 나뉘는데요. 이렇게 관객을 전문인과 일반인으로 나눠놓고 ‘전문성’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는 의문은 바로 ‘미술 전문성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사실 이 전문성의 기준이야말로 다양성이 보장된 새로운 미술이 가진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일 수도 있죠.

사실 이 전문성의 기준을 확실하게 내놓기에는 아직 제 역량이 부족한 느낌이 있는데요. 일단은 전문성의 잘못된 기준을 짚어보면서 제가 생각하는 전문성의 기준에 천천히 다가가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미술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부분을 두 가지 뽑아보자면 미술 전문인이 가진 다양한 미술 지식과 함께 만들어진 글과 강의, 또 독특하다는 생각을 넘어 개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예술가의 작품 세계가 있는데요.

이와 같은 일반 관객도 할 수 있는 작품, 글, 강의와는 한층 다른 전문성이 돋보이는 전문 관객의 작품과 글, 강의는 미술을 한층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입니다. 미술을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 이 전문성과 전문 관객이라는 존재가 미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은 바로 잘못 만들어진 전문성이 몇 가지 존재하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잘못 만들어진 전문성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학력과 함께 만들어지는 전문성인데요. 미술 대학 출신이라는 하나의 타이틀은 미술에 대한 글과 강의 그리고 작품을 전문 관객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가 되고는 합니다. 미술 대학에서 공부하며 모든 교육 과정을 이수 했다는 학력이라는 것은 이를 가진 사람의 글, 강의, 작품에 전문성이 존재할 확률을 높여주는 것일 뿐인데요. 가끔은 학력이라는 배경을 앞세우며 미술의 전문성을 강요하는 현상이 벌어지고는 합니다. 특정 학과를 졸업하였다고 하여 꼭 그 분야의 전문가로서 활동할 수 없는 모습은 다른 분야의 상황과 똑같은 부분이라 생각하는데요. 학력은 결국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을 더 배웠다는 것을 증명하며 전문가가 될 확률을 높여줄 뿐, 학력과 함께 무조건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불리기는 힘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개인적인 취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예술이라는 분야에서는 이 전문가의 기준이 더더욱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기도 하죠.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작품도, 또 아무리 위대한 비평가의 글과 강의도 가끔은 내가 어릴 적 그린 작은 그림으로 나의 부모님에게 드렸던 감동과 여운, 생각보다 작은 효과를 가질 때가 있는 것이 미술이라는 모호한 세상입니다. 작품과 강의, 글의 목적이 무엇인지와 관객의 관람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서로의 상호 작용이 정말 다양하게 나타나는 곳이죠.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현대의 미술은 그저 어린아이의 그림이 부모님에게 주는 감동처럼 그저 감정을 울리는 미술의 세계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감동을 통해 감정적으로 이끌기보다는 흥미를 통해 관객을 이성적으로 설득시키는 것에 가깝죠.

사실 제가 생각하는 전문가의 기준은 바로 이 ‘설득력’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그린 그림은 오직 부모님에게만 설득력을 가지지만, 오랜 시간의 훈련을 통해 그려지는 화가의 그림은 더욱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며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죠. 물론 추상화 등을 그리는 현대의 화가들이 그려내는 그림은 그 결과만으로 화가의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설득력을 얻을 수는 없지만, 추상화라는 결과물을 그리기까지 해왔던 미술 활동의 과정을 통해 관객들을 설득하며 전문성을 얻어내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에 설득당하느냐, 설득당하지 않느냐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달린 것이겠죠.

미술로서 설득력을 얻는 방법에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겠지만, 선 하나를 그리는 것으로 예를 들어보며 생각해보면 이 설득력이라는 부분에 대해 조금은 간단하게 이해해볼 수 있는데요. 이제 막 선 하나를 그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20대의 젊은 화가의 선 하나 그려진 그림은 평생 약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직 선 하나만을 그려온 노년 화가의 선 하나 그려진 그림보다 적은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6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직 선 하나를 그려왔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또 무시할 수 없는 장인으로서의 설득력을 가지게 되기도 하는 것이죠.

이렇게 다양한 활동과 함께 관객들을 설득시키고 전문성을 얻어내는 과정을 통해 일반 관객 누구나 전문 관객으로서 미술 활동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사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 새라 미술 이유식도 제가 여러분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가는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 생각의 과정이 뛰어나든 조금은 뒤처지든 최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죠. 이 부분은 이 ‘새라 미술 이유식’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회차를 통해 조금 더 세세하게 말씀드려보도록 하고요. 

음… 전문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강요되는 순간부터 진정한 전문성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강요는 위에서 말했던 학력을 포함해 경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한 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전문성을 갖출 확률을 높여주는 것에 불과한 학력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무조건 좋은 학력이 미술의 전문성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은 관객을 향한 강요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력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되는 것인데요. 사실 이 전문성에 대해 처음 생각했던 일은 전시회 경력과 얽힌 일화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전시의 목적 등과 상관없이 그저 전시회 경력을 늘리기 위해 진행하며 관객 한 명 방문하지 않음에도 이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는 전시회에서 받았던 충격과 함께 시작됐던 의문과 생각에서 처음으로 이 전문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었죠. 전시회 경력을 내세우는 작가의 관객 한 명의 방문 없이 텅 빈 채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전시회 광경은 전시회 경력을 내세우는 작가의 경력 속 과거 전시회들도 비슷한 모습의 오직 경력만을 위한 전시회였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모르는 한 줄, 한 줄의 경력들이 작가의 전문성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죠. 이 부분도 조금은 새로운 부분이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요. ‘전시회’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려고 하는 다음 회차에서 언급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음… 이번 회차는 예술가, 관객, 작품에 대한 제 생각을 풀어보면서 '예술가도 결국 관객이다.’라는 개인적인 관점 속에서 나타나는 몇가지 의문점들을 풀어본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요. 이러한 이야기들이 여러분을 설득하며 제 작품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가지실 수 있는 요소가 되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재미있게 설득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역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런 시간이 결국 제가 위에서 말했던 강요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까지 최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자제해왔던 것 같기도 한데요. 어쨌든 나름에 매력이 있기에 들어주시는 것이리라 믿으면서 오늘은 이렇게 또 어색하게 마무리를 하도록 해야겠네요. 

다음 회차는 제가 처음으로 내놓은 전시회 ‘가끔 하는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이며 ‘전시회’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이 진행하기 힘든 ‘개념미술가 이동준’ 시리즈도 이제 중반 정도 온 것 같은데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말 보통 벅찬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진행하겠다고 약속을 드린 만큼 빠르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준비하여 돌아오도록 해야겠네요.

그럼 다음 회 차에서 뵙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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